감상의부스러기

현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의 가장 스마트한 자세 - 훈데르트 바서 전.

timid 2012. 3. 24. 09:44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가격이 비싸서 좀 망설이긴 했지만 그동안 몰랐던 복지포인트의 존재를 알게 되고 마치 공짜 전시회를 보런 온 기분으로 갔으니까.

그런데 이 전시회를 보고 나는 훈데르트 바서의 팬이 되어버렸다. 그의 작품도 물론 멋있었지만

나를 반하게 만들어버린 건 그의 생애 전반에서 묻어나오는 지혜로움이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지구온난화로 사람이고 자연이고 몸이고 마음이고 시름시름 앓아가는 이 시대에

훈데르트 바서는 참으로 용기있고 스마트한 아티스트라고 단언한다.

그는 요즘 사람들의 기준에선 괴짜다. '다섯 개의 피부론', '창문에 대한 권리'. 그의 연설 제목만 들으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괴상한 연설은 들을 수록 설득력이 있고,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고나면 그의 그림이 더더욱 아름다워보인다.

 

인류애 - 훈데르트 바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폐기물을 통하여 이 지구에 다시 태어나 영속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쓰레기 없는 사회는 순환을 회복시킴으로써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부엽토 화장실이 부엽토를 생산해냄으로써, 자연 정수 식물이 깨끗한 물을 생산해냄으로써 그리고 자연의 법칙에 따른 장례절차에 따라 죽은 이들이 묘지에 심겨진 나무들로 승화함으로써 죽음은 생명으로 변형됩니다. 이는 또한 독성, 파괴, 단인 체제에서 벗어난 농업과 인간의 모든 활동의 회복을 뜻합니다. 모든 문명은 부엽층이 존재하는 한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이집트, 그리스, 로마와 다른 문명들은 모두 그들의 부엽층이 소진되었을 때 멸망하였습니다. 우리 문명은 우리가 우리의 부엽층을 회복하지 못할 때 쇠퇴할 것입니다."

 

 

자연과의 평화조약
"사람들간의 모든 논쟁에 종지부를 찍고 인류가 생존을 위하여 의존하는 우월한 힘을 지닌 자연과의 조약을 맺기 위한 인간의 권리와 의무, 평화 조약은 다음 사항을 포함하여야 한다.
1. 우리는 자연과 대화하기 위해 그녀의 언어를 배워야한다.
2. 하늘 아래 수평인 것은, 예를 들어 지붕들과 길들, 모두 자연에 속한다는 원칙을 따라 인간에 의해 불법적으로 침범당한 영역을 자연에게 돌려주기 위하여.
3. 자연적인 초목을 용인하기 위하여.
4. 처참한 결과를 초래하며 분리되었던 인간(예술)의 창의성과 자연의 창조력을 다시 접근시켜 재결합하기 위하여.
5. 평화 속에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살기 위하여.
6. 우리는 자연에 들린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켜야한다. 인간은 지구를 황폐화시킨 가장 위험한 유해 동물이다. 인간은 자신을 다시 환경이라는 울타리 뒤에 세워서 지구가 회생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7. 우리는 다시 쓰레기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한다. 쓰레기 없는 사회에서 자신의 쓰레기를 존중하며 재활용하는 자만이 죽음을 생명으로 바꿀 수 있으며 이 지구에 계속해서 존재하는 권리를 갖게 된다. 순환을 존중함으로써 그는 생명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모더니즘에 냉소한다. 사람이 모든것을 정복하여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자연관을 거부한다.

그를 철학자에 비유한다면 노자나 장자에 가깝다. 인류는 자연의 일부로서의, 자연이 영속할 수 있게 할 부엽층으로서 존재해야 한다. 자연을 황폐하게 만들고 먹을 것이든 입는 것이든 소비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대량생산함으로써 개별적인 것들의 고유함을 박탈하는 현대 사회에 그는 정중하게 '노'라고 외치고

그림으로 그의 이론을 이야기한다.

 

"나는 고대한다
내 자신이 부엽토로 돌아가기를
관 없이 나체로
내가 직접 심은 밤나무 아래 묻혀
아우테이어러우어의 내 땅에.

죽은 이의 매장은 관 없이 행하여져야 한다
수의에 쌓여 흙 속에
적어도 60센티미터 두께로.
고인의 무덤 위에는 반드시 나무가 심겨져야 한다
그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상징적임과 동시에 현실적으로

죽은 이는 환생할 자격을 부여받는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자라나는 것과 같이
그의 위에 그리고 그를 통해
이로써 영원한 삶을 사는 이들의 신성한 숲이 탄생한다
행복한 망자의 정원."

 

-그의 전시회 맨 앞에 써있던 이야기다. 죽어서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거. 이 글귀를 보기전엔 그냥 가을동화에서 송헤교가 죽으면서 씨부렁거리는 한담이네 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고 나니 꽤 괜찮은 생각같다. 나무로 다시 살아나는 사람, 지구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생명체로서의 사람.

 

"창조할 권리
창조는 무엇보다 중요한 인간의 조건이다. 창조할 권리는 음식에 대한 권리보다 중요하다. 만약 사람이 창조하지 않거나 또는 창조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그는 이 지구상에서 고등동물로서 존재할 타당한 이유를 잃게 되며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다 하지 못하게 된다. 진정한 문맹은 읽고 쓰기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소위 말하는 원시인들, 그리고 바보들이 획일화, 교육, 관습에 의하여 그들의 영혼을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문명인'보다 창조할 수 있는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다."

작품 하나 하나에 고유성을 부여한 것이다. 대량 생산품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자기 작품에 대한 스마트하고 멋진 애정을 가진 예술가가 있다니!

 

"우리는 모순된 반(反)시간 속에 살고 있다.
가치관은 온통 뒤죽박죽 엉켜있다.
추함은 정직함과 유의미함으로 간주되며
아름다움은 상표화된 포퓰리스트 키치이다.
시간, 시계는 마감시간을 압박하는 상징이 되었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자연 및 생물과 조화를 이루는 일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야한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 영원의 가치들, 우주에 대한 자각, 위와 아래, 좌와 우, 시계 방향과 반시계 방향이 존재 하지 않는 곳. 이곳이 사실상 우리의 사업적 사고방식적 시간이 아니라 반 시간을 나타내야 하는 이유이다. 시간은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 유기체이며 아름다운 형태 속에서 일어나느 유기적인 삶의 과정이다.
시간은 서서히 나선적, 식물적이면서도 확실하고 창의적으로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 시간은 이전의 시간을 파괴해서는 안되며 내일 모레 죽음이 찾아올 것이다- 같은 내일의 시간에 대한 공황상태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중략) 시간을 측정한 다는 것은 직선과 동일하게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된 생각과 발명, 사건들의 영원성과 공존하는 것이다."
-시계 제작의 서문

 

 

 

나선

 

"나선은 생명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나선은 무생물체가 생명체로 변하는 바로 그 지점에 놓여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바탕을 두고 있음과 동시에, 생명은 어떤 방법으로든 시작되었고 무생물체의 발전 과정이 나선의 형체를 띠었다는 과학적 증명에 의거한 나의 신념입니다. 나는 생명체의 창조가 나선의 본질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성경은 생명이 무생물의 틀에서 시작되어 서서히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은 물체에 숨을 불어 넣는 것이 나선의 본성이라고 생ㅇ각합니다. 나선형은 단세포나 다세포 생물에서 거듭 보여집니다. 멀리 있는 우주체의 행성들도 나선의 구도를 이루고 있고 분자들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인생 전체는 나선을 그리며 전개됩니다. 우리의 지구는 나선적 흐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원을 그리며 움직이지만 절대로 같은 기점을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 원은 닫혀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시작한 기점과 가까운 높이에 다다를 뿐입니다. 원과 같이 보이지만 닫혀있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나선의 특징입니다. 물론 나선에 대한 그릇된 이해도 있었지요. 과도하게 양식화 되어 그저 장식용이나 기하학적으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하학적 나선은 오로지 곡선 사이에 간격이 정확히 측정되었을 때 그려질 수 있지만 그것은 죽은 나선입니다. 독창성이 철저히 결여된 기하학이 전부인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나에게 나선은 부풀어 올랐다 가라 앉았다, 두꺼워졌다 얇아졌다 하는 나무의 나이테와 같은 식물성 나선입니다. 나선과 나무의 나이테가 다른 점은 나선은 큰 원 안에 작은 원들이 속해 있는 모습이 아닌 하나의 모형을 띠고 있다는 것이지요. 나선은 여러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에를 들어 나선의 중심에서는 어느 방향, 좌 또는 우로 돌고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나치의 만(卍)자와 같이 악한 나선은 오른쪽으로 선한 나선은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중략)나의 나선은 식물과도 같이 자라나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나선의 선들은 구불구불한 강처럼 식물의 성장 법칙에 순응합니다. 나는 그저 나선이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따라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렇게 할 때에 나는 실수를 범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나치게 본능을 따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나는 하나의 본보기로서 살고 싶다.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살며
그들 각자 내면에 갖고 있을 파라다이스를 그려주어
그것을 붙잡기만 하면 될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파라다이스는 오직 개개인의 창의력으로, 자연의 자유로운 창조력과의 조화를 통해 만들수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의 창의력과 자연츼 창조력이 조화를 이룬다면 그곳이 파라다이스인것이다. 그는 건축물을 디자인할 때 파라다이스를 꿈꾼 것이다! 얼마나 멋진 생각인가. 건축을 하기에 앞서 남들은 어떻게 하면 더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지을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그는 어떻게 하면 더 파라다이스에 가깝게 지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짓는 자의 아이디어가 그렇다면 그 건물 안에 사는 사람은 또 얼마나 행복할까.

 

 

 

 

서양에서는 테피스트리를 보온용, 인테리어용으로 직조해서 만든다고 한다. 대부분 일정한 그림틀이 있어 그대로 기계가 박아서 만든다고 하는데 훈데르트 바서의 테피스트리는 세상에 하나 뿐인 테피스트리다. 그는 그림틀을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 완성작의 그림틀을 따로 보관해두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인 그것이 될 수 있게 장인의 손길로 한 땀 한 땀 만들어내서 비록 그림은 투박해보일지 모르나 그 가치는 어떤 화려한 테피스트리에 비할 바 없다고 할 수 있다. 소위 명품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가방이나 지갑들 화려한 사치품들을 사면 마치 그 브랜드의 뮤즈라도 되는 양 또는 그 아이템에 지불한 돈의 가치가 곧 나 자신이라도 되는 양 위세를 떠는 현대인들의 눈에 이 테피스트리는 어떻게 비춰질까. 궁금하다.

 

 

 

- 지금 이글은 훈데르트 바서전에 다녀오고나서 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년 전쯤 임시 보관함에 담겨있던 글이다. 마침 나는 오늘 손석희의 시선집중의 토요코너 '토요일에 만난 사람'에서 출판사 [보리]의 대표이자 변산에서 농촌 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는 윤구병 살림꾼 선생님의 인터뷰를 듣고 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훈데르트 바서의 생각과 맥을 같이 하는 분이었다. 그 분의 출판사는 9시 출근 17시 퇴근이 의무화되어있으며 재택근무나 초과근무를 예방하기 위해 한 해 출판해야할 책의 권수를 감축했다. 무슨 생각인가 시간이 금이고 돈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이시기에 무슨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이렇게 근무시간을 감축함으로써 불필요한 노동을 줄이고 최소한의 필요한 노동만을 하여 노동을- 자세히 말하자면 노동을 통한 소득을 원하는 누군가를 위하여 노동의 여지를 남겨놓는 것이고. 비록 출판사 직원 중 대부분이 지금은 17시(오후 4시)에 퇴근해서 뭘 해야하나 막막하기만 할지라도 이 루틴에 익숙해진다면 노동 그 이외의 시간을 보다 풍족하게 사용하는 지혜를 배울 것이며 결과적으로 정말 (효율적인X) 효과적인 노동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기대이고 확신이었다.

또한 농촌 공동체는 마치 현대 생활과 절연된 다른 세계 같았다. 핸드폰도 TV도, 인터넷도 없는 세계. 아이들에게는 시험 스트레스나 공부에 대한 압박 없는, 어른에게는 하기 싫은 노동에 대한 압박 없는 그저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 수 있는 세계. 자격 조건도 없고 그저 한 달정도 그대로 두면 한 달을 제대로 버틴 사람은 그 곳에서 도시로 떠나지 않고 그 공동체가 더 향기로워질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한다고 한다.

어디론가 무엇엔가 몰두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은 이 세상에서 훈데르트 바서나 윤구병 선생님이 주는 메시지는 흘려 버리기엔 너무나 소중하다. 뭔가를 파괴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이 시대 인류의 생활 방식에 이 분들의 외침이 아름다운 울림으로 오래오래 전해지기를, 그리고 나 역시 그 분들의 생각을 잊지 않고 아주 조금은 닮아갈 수 있길, 그리고 그 닮음을 아이들에게도 향기로 전할 수 있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