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의부스러기

시간을 보는 컨템포러리 아티스트들의 시선 -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展

timid 2010. 8. 11. 12:13

 

사실 여기 다녀온지는 좀 됐다. 6월 말쯤이었나?

2년 전에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렸던 "미술의 표정"전시회를 본 이후로 전시회를 보는 내 생각도 좀 달라졌다.

그전까지는 그냥 전시회라고 하면 서양의 무슨 유명한 화가의 무슨 대단한 작품이 와야지만 보러 가는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현재 활동하고 있는 화가들의 작품도 관객에게 감흥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걸 알게되었다.

영어 전담에다가 맡은 일도 없고 하루하루 시간떼우기에 지쳤을 때 미술관을 여기저기 뒤져보다가 덕수궁 미술관에서 하는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라는 전시회를 찾게 되었다. 게다가 7월 초까지 덕수궁에서는 고궁음악회(고궁에서 우리 음악듣기)가 매주 주말에 열리고 있으니 간만에 서울 나들이 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무슨 약속이라도 잡아놓은 것 처럼 그날은 필사적으로 덕수궁으로 갔다.

 

이날 온 공연팀이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국악을 재즈와 살짜기 혼합하여  낯선 노래는 친숙하게, 친숙한 우리 노래를 약간 낯설게 그려냈다. 찾아보니 이름은 '강은일과 해금 플러스'팀이었다., 가운데 분홍색 한복 드레스 입고 해금 연주하시는 분이 강은일 교수. 해금연주로는 꽤 유명하신 분이었나보다. 숙명여대에서 해금 교수로 계신 분이라고 했고, 이들의 공연에는 짬을 내서 강은일 교수의 제자들의 해금 공연도 있었다. 해금은 참 신기한 악기였다. 어떻게 들으면 정말 서방님 먼길 떠나보내서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아낙네의 울음소리처럼 구슬프고 청승맞다가도 언제그랬냐는듯이 익살스러운 '깽깽이'소리를 내며 신명을 내기도 하니 말이다. 두 줄로 된 악기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그렇게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랍고, 그게 또 우리 악기라는게 새삼 자랑스러웠다. 해금뿐 아니라, 구름 낀 달밤을 연상시키는 허스키-한 대금소리와, 때로는 귀엽기도 때로는 웅장하게도 들리는 피리소리, 그리고 어떤 건반 악기보다 우아한 소리를 자랑하는 가야금소리, 퍼커션과 기타, 베이스등이 어우러져 나오는 소리가 국악이 소중히여겨왔던, 그리고 이 시대의 새로온 조화 내지는 콜라보레이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덕수궁에 온 이유는 이 공연보다는 전시회때문이었는데 도저히 언제 발걸음을 떼야할지 고민이 될 정도로 공연은 참 좋았다.

 

 

결국 공연의 끝까지 다 보고나서야 겨우겨우 발걸음을 미술관으로 옮길 수 있었다. 미술관에는 강, 물, 달, 끈을 테마로 시간을 표현한 여러가지 작품이 있었다. 전시회의 초반부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었다.

 

"시간을 본 이는 아무도 없으나 우리는 시간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속도만을 체감한다. 그리고 시계를 보며 우리의 상대적 위치를 가늠하는데, 시계라는 이 흥미로운 인류의 발명품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계측 가능하고 가시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 시계 침의 똑딱거리는 움직임과 소리는 시간을 분절시키고, 그 분절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초조감과 함께 촌각을 다투며 살아간다. 그리고 보다 더 빠르고 가시적이며 신속한 것에 대한 체질은 보다 빨리 우리를 자극하고 해소시키는 무언가를 욕망하게 한다. 빠르게 뛰어오르고 급변해야 하는 효율성 위주의 가치는 보다 연속적이고 자연적인 시간성을 따르는 삶과 예술의 양식을 뒤로 둔다. 수많은 정보, 테크놀로지의 발전 속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상실감, 그것은 우리가 이전에 맺었던 보다 넓은 지평선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달은 가장 오래된 시계다”라는 전시제목은 손목에 매달린 시계를 보기 위해 아래로 숙여야 했던 우리의 시선을 저 위로 끌어올려 하늘 위로 옮겨다 놓는다. 그것은 달을 보며 농사를 짓고, 몸의 주기를 짐작하며, 달의 주기에 따른 열 달간의 생명을 잉태하던 자연과 긴밀히 닿아있는 관계, 그 연결을 파악하던 인간의 원래적 소통을 추구한다.


 

예술이 인간이 세계와 소통하는 방식의 풍요로움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감응력(感應力) 느끼고 조응하는 정신의 힘, 즉 감응력의 회복은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노력의 다른 말이 될 것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물의 흐름과 번짐, 달의 차고 기움과 같이 연속적이고 자연적인 시간을 감지하게 한다. 또한 고요와 침묵이 갖는 가치, 미묘한 움직임이 전달하는 억제할 수 없는 파동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섬세한 조형적 변수들은 철저한 집중을 요한다. 시각에 호소하는 미술작품들은 시간의 비가시적 속성에 주목한다면 그 반대에 위치하는 듯하지만 흘러가는 시간의 고요함, 그 ‘소리 없음’에 집중한다면 적어도 함께 침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작품들은 시간을 보이게 할 수는 없어도 시간을 비추어 낸다 ― 어둠 속의 달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밤의 태양을 비추어 쉼 없이 쏟아지는 빛의 존재를 증거 하듯.


 

전시가 열리는 이 곳 덕수궁 미술관은 오래된 정원,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곳이다. 돌로 지어진 이 궁은 콘크리트로 재빨리 쌓아올린 속도의 도시, 서울의 인파 속에서 또 다른 시간성의 상징처럼 다가온다. 미술관 입구의 등에서 돌 벽, 철로 된 문고리까지 공간 자체가 세월의 흔적과 시간의 흐름을 몸소 보여주는 이 곳에서 새롭게 설치, 영상, 회화, 조각, 수묵 등 지금의 미술이 그 예술적 대화를 시도하고자 한다.


 

전시는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섹션별 이미지인 “강”, “물”, “달”, “끈”은 시간의 메타포로 자리한다. 그러나 시간은 결국 네가지 상징의 의미를 모두 품은 것이다. 이 말들은 모두 "흐르다","번지다", "차고 기울고 차다 . "이어지다"라는 동사와 연결되어 있다. 말들ㅇ느 그 어미를 다시 "듯"으로 바꾸어 "흐르듯",  "번지듯", 차고 기울고 차듯", "이어지듯"으로 다시 한 번 부드럽게 흘러간다. (중략)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시간을 바라보다 보면 무언가 우리 존재의 근본과 만나는 듯한 꿈틀거림을 감지하게 된다. 그 꿈틀거림은 순간을 조각내겨 돌아가는 시계 침둘에 대한 우리 내면의 비춤, 그 반영이 아닐까? 혹은 달의 주기와 열 달을 견디고 세상 속에 던져진 우리 안에 원래부터 자리하고 있던 자연의 시간성, 그 회복에 대한 본능적 회귀욕구일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가 빽빽한 도심 속의 숨구멍과 같은 이 공간에 새로운 생동감을 부여하고 관람객들의 발길을 조금은 느리게 만들어주기를 기대한다. -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김남인"

 

 

첫번째 섹션 "강_시간이 흐르듯""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된 작품은 도윤희의 '액체가 되어버린 고민'이었다.

멀리서 보면 이 작품은 꼭 뭔가가 일렁이는 것같은 착각을 준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이 작품은 그저 연필로 만든 점들이 점점이 우연적으로 만나고 멀어져가며 만들어져있었다. 연필만으로 그린 작품에서 이런 느낌이 나다니! 점같지만 선같고 선같지만 점이 모여 이어진 것을 우리는 '시간 '이라고 불렀었나? 점 하나하나가 오브제 같기도 하고 멀리서 바라본 이 일렁이는 하늘인듯 강인듯한 것이 오브제인것 같기도하고. 나는 이 그림을 가까이서보기도하고 멀리서 보기도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자리를 떼지 못했다.

 

그 건너편에 있었던 작품이 김호득의 "흔들림, 문득- 공간을 느끼다"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심플하다. 서로 다른 길이의 한지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천정에 설치되어있고 아래에는 먹물이 강가에 물이 흐르듯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이게 뭔가'싶다가도 난 일순간 감동했다. 한지에 비치는 먹물의 흐름새는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이라 칭함받을 수 있을만큼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벽면에 적절한 조명으로 인하여 비치는 흐르는 물의 그림자 역시 아름다웠다. 흐르는 물이 가진 생명력과 물만이 갖는 평온함 모두를 이 작은 공간에 담아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충분히 가치가 있어보였다.

 

다음 섹션은 물이었다. 물과 강이 무슨 차이야? 싶기도 했지만 '강' 섹션은 흐르는 물이 주는 시간의 느낌을 표현했다면, '물'섹션은 물이 종이나 무엇인가에 스며들어 번져가는 시간의 느낌을 표현한 곳이었다. 내가 이 섹션에서 좋아했던 작품은 한은선 씨와 도윤희 씨의 작품이었다.

 

한은선 씨의 작품을 보고 다른 작품들을 돌아보고 나서 또 봤다. (아래는 한은선 씨의 "물결치다")

 

미술관은 참 좋은게, 이 안에 있을 때까지만은 보고싶을 땐 언제나 그 작품을 다시 볼 수 있고 그 때마다 다른 감흥을 느끼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간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친구와 함께 가면 서로의 감상을 이야기할 수 있고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 감상을 좀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감상은 어떤지 내 감상과 비교해보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또 다른 시선을 갖게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내 감상을 기록할 시간이 없고 친구와의 의견이 부딪히거나 내가 느낀 것이 이상하다는 반응을 얻었을 때 좀 머쓱해지고 내 감상을 부끄러워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혼자 가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나 혼자 내 감상을 기록해둘 수 있고 또 그 기록을 여기 블로그에 올려 두고두고 기억할수 있고 내 감상 자체에 솔직할 수 있어 좋다. 무튼 이 작품을 보면서 내가 느낀 건 한 마디로 '신비로움'이었다.  신비로울 수밖에 없다. 어떻게 우리가 매일 마시고 소비해버리는 물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우주를 발견해낼 수 있단 말인가! '번짐'은 우리가 흔히 예술작품이라 일컫는 근대 미술과는 다른 현대 미술에서의 발견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대로 투영시키는 근대작품들과는 달리 번짐 또는 흐름이 고스란히 드러난 예술작품은 의식과 무의식, 인위와 무작위의 경계 사이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와도 같다. 그대로 내버려둔다고 해서 작가가 원하는 작품이 나올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이렇게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라는 생각과 딱 들어맞는 작품이 나올 수도 없다. 작가의 의도와 우연적 효과가 적절한 합의를 이룬 하에 작품이 완성된다. 이런 작품에서 작가가 하려는 말은 우연의 효과와 함께 흩어지기도 하고 관객의 시선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감상에 정답은 없다. 내가 이 작품에서 우주를 보고 누군가는 그저 물방울의 흩어지는 모양을 보는 것에 대해 그건 100점짜리, 그건 빵점자리 감상이라고 평가할 수도 없다. 그 역시 예술의 영역 안에 포함시킨 것이 현대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이 아닌가 싶다. 작가의 의도는 제목을 통해 어렴풋 드러날 뿐 그것을 굳이 올바르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작품을 통해 작가와 관객 모두 예술의 영역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 어떻게 보면 근대미술의 섬세함과 아름다움보다 더 한 경이로움이 현대미술에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는 한은선씨의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다음에 본 작품은 아까 첫번째 섹션에서 인상깊게 봤던 도윤희씨의 작품 몇 가지인데, 정말 그녀의 작품은 신기하다. 연필만을 이용해 어쩌면 그런 오묘한 느낌을 낼 수 있는지 아까의 그림에서는 연속적으로 또는 비연속적으로 이어진 점들을 통해 마치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면 이 그림은 마치 그림이 소리를 지르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또한 작품의 이름은 '살아 있는 얼음'이다. 정말로 물이 일순간 얼어버린 그 순간 같기도 하면서 분자 각자가 어디론가 흩어져버리려는 순간을 담은 것 같기도 하다. 소리도 지르고 움직이는 듯한 느낌도 주니, 정말 이 작품은 살아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의 내가 참 좋아하는 작품은 바로 이것이다.

 블로그에 올리면서 이작품은 정말 작아졌지만 실물로 보면 폭이 무려 5미터나 되는 엄청 커다란 작품이다. 제목 또한 참 멋지다. "이곳에서 몸 속의 분자가 가장 순수하고 황홀하게 들썩거렸다." 지금은 참 조그만해졌지만 다시 봐도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정말 내 몸속의 분자가 순수하고 황홀하게 들썩이는 느낌이다. 작가가 있었던 '이곳'에서의 황홀함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느낌이다. 이 작품이 왜 물, 시간과 엮이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그림은 마치 물보라가 내게 아름답게 밀려오는 그 순간을 포착해낸 그림같기도 해서인것 같다. 아님 말고. 무튼 나는 이 작품이 참 좋다. 보고있으면 저절로 설레임 또는 기쁨 또는 황홀함이 마음속에서 퐁퐁퐁 피어오르는 느낌이 든다. 이런 작품을 갖고 싶기도 하면서 동시에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었으면 싶기도 하다. 이 작품을 만들 때 작가가 어디에 있었는지 그때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도 궁금하고.

 

물 섹션에서 나오고나니 불상 열 개 정도가 죽 늘어서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야외에도 몇 개 놓여져있었던 이 작품은 신미경 씨의 '트렌스레이션-풍화'라는 작품이었다. 엥 왠 불상? 하는 생각으로 늘어서있는 불상들을 훑어보던 나는 불상의 몸과 얼굴이 저마다 다르게 긁히거나 지저분해졌거나 문드러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면 불상에서 향기가 은은하게 풍겨나오는 것 때문에 소재가 비누라는 것도 그쯤 발견해냈다. 가장 풍화가 많이 된 작품은 여덟번째 작품과 열번째 작품이었던 것 같다. 시간의 순서대로였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래되었다고 풍화가 많이 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더 오래 산 사람이라고해서 인생의 깊이가 더 깊진 않은 것처럼 말이다. 

 불상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가 가장 예뻤을 것이다. 하지만 물에 씻겨나가기도 하고(물에 씻겨나간 것을 잘 보여주기 위해 비누를 사용했었던 것 같다. 또한 물과 비누를 통해 세상의 더러움을 씻기는 보살의 모습을 상징화한거 같기도?) 바람에 몸의 일부가 깎여나가기도 하면서 역경의 시간을 지날 수록 보살의 표정은 더 온화해보이고 그 형체는 더 신비스러워보인다. 비록 손이 닳아없어지고 코가 문드러졌어도 흠없는 불상보다 더 아름다워보이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효과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다음 섹션은 '달'이었다. 달 섹션에 적혀있던 이야기를 옮겨 적자면 다음고 같다.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시간의 단위, 시계는 둥근 형태로 상상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얼핏 평범한 듯 하면서도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오랜 관념ㅇ르 품고 있다. 모나지 않고 펼쳐지는 것, 끝없이 둥글게 순호나하는 것, 그리고 하늘을 닮은 것이라는 인식 말이다. 옛 사람ㄷ르은 달의 차고 기움. 그 변화와 위치를 통해 스스로의 시간적 위치를 상정해왔다. 달의 변화는 물의 흐름처럼 연속적이고 끊임없으면서도 순환과 반복을통해 회생을 반복하는 하루하루의 움직임을 닮았다. 개념적 시간을 넘어 자연과 우주의 광대한 움직임과 인간의 조응을 통해 찰나와 순간의 의미를 확장해 나가는 시간관은 본 섹션의 작품들을 통해 드러난다."

 글은 참 멋진데 작품들은 그닥 나에게 큰 인상을 주진 못했다^^;; 이 전시의 모티브를 줬다는 백남준씨의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라는 작품도 내게 그닥 와닿진 못했다. 아래 작품은 강익중 씨의 '365 달항아리'라는 작품이다. 365개의 나무 막대모두가 저마다 다른 길이를 갖고 있는 채로 커다란 직사각형 하나를 완성하고 있으며 막대기의 상단 흰 평면에는 달항아리들이 그려져 있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이 내가 느낀 전부였다. 그래서 긴 토는 달지 않겠다.

 

 

 

내가 좋아했던건 백남준 씨의 티비를 이용한 작품들보다는 이렇게 작고 귀여운 작품이었다. 왼쪽은 '시간은 끝나가고 태엽도 끝나간다.'이고 오른쪽은 '인생에 태엽은 없다'이다. 작품의 크기는 아담하지만 담고 있는 의미는 제법 진지하다. 개인적으로 왼쪽 작품을 더 좋아했는데 더 큰 그림이 없어 아쉽다. 이 작품을 봤을 때 했던 생각들이 가물가물 잊혀져버렸는데ㅠㅠ 무튼 이 두 작품이 일관되게 갖고 있는 메시지는 하나다.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태엽은 다시 돌리면 되지만 비디오 테이프도 리와인드 버튼만 누르면 그만이지만 시간이 지나가버린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지나간 건 지나간 대로, 붙잡을 수 없는 지금 이순간에 있는 힘껏 행복할 것. 나는 이작품이 내게 주는 의미를 그냥 이렇게 정리했다.

 

마지막 섹션은 '끈_시간이 이어지듯'이었다. 끈은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동시에 사람들 사이의 인연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 인연이 얽히고 설켜서 만드는 것이 인간의 역사이고 이 역시 시간의 흐름과 일맥한다.

"순간과 순간의 의미있는 만남과 교차는 하나의 맺음을 이루어낸다. 하나의 작품 역시 무수한 맺은 과 연속적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본 섹션에서는 찰나의 시간성을 밀고 나가면서 순간과 순간의 만남과 교차, 연결과 집적을 통해 형상을 이루어가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마치 사람과 사람의 끈. 인연과 같이 순간이 교차하는 만남이 또 다른 길을 만들어가고 이와같은 만남이 마침내 시각적으로 나타나 연결과 연결을 거듭하는 전시된 작품의 세계를 이루어낸다. 작가들은 바느질을 하듯 가는 철선이나 세필, 머리카락과 같이 섬세한 매체들을 조심스럽게 짚어간다."

작은 단위가 하나하나 이어져가는 과정은 창조적 느낌이 펼쳐져 보이는 시간의 궤적이었다. 아래의 작품은 이 섹션에서 가장 크고 눈을 끄는 작품이었던 함연주 씨의 '올'이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저 선들이 머리카락이라는 것에 헉스럽기도 했다. 머리카락이 길어지는 것 역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의 반영이었고 그렇게 길어진 머리카락들이 서로 만나고 만나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우주를 표현하고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었던 마지막 작품은 김홍주 씨의 작품이었다. 그의 작품은 큰 형태로만 보면 큰 의미가 없어보인다. 제목도 죄다 '무제'이다. 하지만 아주 가는 필선 하나하나가 수억개씩 오가며 엉키고 모여 만든 이 형체에 누가 감히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가장 기초적인 원자들의 움직임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우주를 아주 멀리서 바라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세포같기도 하고 빛같기도 한 이 작품에서 나는 "존재하는 순간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했다.(사실 지금 봐서는 잘 모르겠는데 여기에 다녀온 나의 감상평에는 이 작품에 대한 무한 칭찬이 적혀있다.)

 

 

 

 

 이 전시회가 시간이 아닌 다른 주제로 열렸다면 내 시선 역시 달라졌겠지?

요즘 사람살이가 그렇듯 예술도 보는 시각에 따라 감상도 제각각이고 그 것 하나하나가 누군가에게 또다른 영감을 불어넣는 예술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어떠한 질문이든 정답이 없는 이 세상이 참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예술의 영역에서만큼은, 그 사실이 참 즐겁기도 하다. 그것은 내가 앞으로도 틀에 박힌 전시회보다는 이런 동시대 현대미술의 풍경을 찾아다닐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약 두시간 정도 일상과 전혀 관계없는 생각의 세계로 인도해준 이 전시회에 감사함을 표하며 전시회 감상록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