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의부스러기

결국, 기어코, 예상했던 그대로.

timid 2009. 12. 24. 01:25

 

 

 

 

비담은 죽었고 그래서 그렇게 비담의 사랑도 끝났다.

안타깝게도 나는 마지막회를 못봤다.

하지만 피눈물 흘리면서 달려가는 비담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는 억지설정 억지비극을 보는 것 보다는

내 나름대로 사랑의 끝을 생각하고 내 기억속에 머뭇거리고 끝내 말할 수 없었던 사랑을 쥐고 가버린 그를 추모하는 게

어쩌면 더 나을거란 생각도 든다.

한편으로는 미실이 죽은 이후 시청자들의 눈을 끌만한 마땅한 스토리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작가들이 조연급 캐릭터였던 비담을 이다지도 괴롭게 만들은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비담의 캐릭터는 입체성이 강해서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그런 그가 여주인공을 사랑하다가 오해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그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는 이야기는

너무 진부해보이기는 하지만, 그 사랑의 주인공이 비담이기 때문에 진행해볼 여지가 있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 공식홈페이지에는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퍼다 나르거나 직접 만든 비담♡덕만의 뮤직비디오가 수십편 올라왔고

나는 그걸 몇개 골라보면서 그동안 참 어려운 캐릭터였던 비담을,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사람이 짝사랑때문에 혼자 가슴앓이하는 그 어려운 내면연기를 몸짓으로 눈짓으로 너무나 호연해준

김남길에게 다시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이 몇개 있었다.

왕으로서의 행보를 위해 처음 백성을 벤 덕만이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과 앞으로 나아가야할 패업에 주저하며 파르르 손을 떨고 있을때,

그 손을 따숩게 잡아주고는 "나한테는 그냥 그대로 보여줘도 되요, 그래야 설레어요." 오글거리는 멘트를 제법 멋진 목소리로 주절대다가 멋쩍은 듯

"그래야 백성들도 설레이고 조금씩 변할거에요.^^"하고 웃어버리는, 그러면서도 이내 "혹시 알아요, 나도 변하게 될지."라는 말은 그저 눈으로만

하고 말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비담은 그의 생각대로 변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또 한 장면은 유신이 어쩔 수 없이 보종의 딸과 혼례를 치룰 때 "유신을 놓을 수 없다"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던 덕만을

어떻게 위로해야할지, 어떻게 자기 마음을 표현해야할 지 몰라 그저 답답하게 애뜻하게 그녀를 바라볼수밖에 없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비담의 삶에 대해 그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적어보면 이렇게도 길다.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누군가에게 따뜻한 대접 한 번 못받고 살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그의 고귀한 혈통(?)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한 나라의 왕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대대로 왕비 또는 후궁을 배출하는 가문의 총명한 색공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왕비로 인정해주지 않는 아버지의 우유부단함과, 그런 아버지를 더이상 섬길수없는 어머니의 야망에 희생당했다.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그의 인생은 그처럼 불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문노의 제자가 되어 살았던 삶또한 어떠한가.

어머니의 총명함과 잔인함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마치 태고의 사람같았다. 순수하고 단순했지만 동시에 예외가 없었고 거칠었다.

엄한 사부의 밑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았지만 그를 항상 존경해왔다. 그 방식이 조금 독특했을 뿐이다.

사부는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에게 무섭게까지 씨내림된 그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그를 밀어냈다.

한번도 내색할 순 없었지만 그도 느꼈다. 이유는 잘 몰라도 사부가 그를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문노는 오직 책임감에 이끌려 그를 곁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줄곧 외로웠을 것이다. 태어나 처음만난 그리고 유일한 가족같은 사람이 자기에게 마음의 거리를 두고 지내는데 오죽했을까.

그렇게 20수년을 살다가 처음으로 또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게 덕만과 그 일행이었다.

덕만은 그와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비담에게 덕만은

죽거나 또는 모진 고초를 당하러 끌려가는 길임을 알면서도, 도망칠 수 있으면서도 그깟 약재 몇 근때문에 자기 목숨을 포기하길 각오한 사람이었고.

겁많고 연약한 계집애인줄만 알았는데 대의를 위해 스스로 일어섰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로를 알게된지 얼마 되지않았음에도 그를 깊게 믿어주었다.

그렇게까지 신뢰가 깊은 이유는 뭔지 모르겠지만 무튼 비담은 그점에 끌렸던 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를 가늠할 수 없을만큼 깊게 믿어주는 사람.

호들갑을 떨고 괴상한 행동을 해도 다그치기 보다는 웃어주는 유일한 사람.

그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고, 그럼 비담 스스로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세상은, 사람의 마음은 비담의 생각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비담이 꽃을 주고 그 사람을 웃게 해주어도

그 사람은 줄곧 먼 곳을 봤다. 비담의 앞에서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눈물 지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그 사람을 다독여봐도 도저히 그 사람의 마음은 나아질 것 같지 않고

생각같아서는 그냥 꼭 끌어안아주고 싶은데 그러면 안될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데, 내가 지금 이사람을 안아주면 나를 밀쳐내겠지.

또다시 누군가에게, 그리고 절대로 이사람에게만큼은 상처받고 싶지 않아.'

그저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그렇지만 그럴 수 없는 마음을 눈으로만 전할 수 밖에.

그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동안 스승님에게서 느꼈던 존경이나 원망을 넘어선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정의 덩어리들 말이다.

예를 들어 질투라거나, 애달픔이라거나, 사랑이라거나. 뭐 그런 것들.

가뜩이나 그가 무조건적으로 지지했던 그녀의 적이, 그동안 존재조차 모르고 살았던 어머니라는 걸 알게되면서

혼란스럽고 머릿속이 복잡한데 겉잡을 수 없이 그의 마음속에 파고든 그 감정의 덩어리들에 그는 얼마나 당황하고, 괴롭고, 기뻤을 것이다.

그렇게 감정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그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문노의 제자로 세상을 떠돌았던 시간동안 잃어버렸던 자기 운명을 되찾아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운명, 그래 운명이라고 명명짓는 것이 좋겠다.

온세상을 제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여인의 아들로 태어난 것,

온세상을 제품으로 품고 싶어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

사랑할 수 없는, 사랑해서는 안되는 여인들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건 운명이 아닌 다른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이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그의 파멸 역시 예정된 것이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했기때문에, 그는 그의 사랑은 파멸할 수 밖에 없었다.

움켜쥐려 할수록 흩어져만가는 마음의 조각들을 주워보려 애썼지만,

그 마음의 조각을 움켜쥔 순간, 스승에게서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았던 트라우마가 그를 쥐어 흔들었고 결국 통제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겨우 움켜쥐고 있던 마음의 조각을 놓아버렸다. 곧 그가 그렇게도 원했던 사랑의, 종말이었다.

그렇게도 원했던 덕만의 사랑을 얻은 순간,

그 사랑이 언젠가 변해버릴 것이고 또다시 버림받게 될 거라는 불안에 잠식되어버린 그는

사랑하면서도 그녀의 적이되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절대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한편으로는 믿고싶으면서도,

이번만큼은 '그녀에게만큼은 버림받는대신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내것으로 만들고 결국 그녀가 가진 것은 나, 비담 하나로만 만들어 나를 버릴 수 없게 하리라' 하며

아이러니하게 그녀에게 칼을 겨눈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비담에게 그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그녀를 위해, 그녀가 신라를 원한다면 비담은 스스로 신라가 될 각오가 되어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오해였다는 걸 알게되고,

그가 했던 그 모든 일들이 결국 그녀를 아프게 만드는 일임을 깨닫고

그는 너무나 쉽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외면하는 스승에게 칼을 겨누다가, 스승이 죽을 지경이 되자 울음을 터뜨렸던 그 때처럼.

돌이키기엔 너무나 늦어버린 걸 알지만

사지로 뛰어들어 스스로를 무너뜨림으로써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을 미워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고, 다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 곁에 더 오래있고 싶어서, 당신을 내곁에 더 오래두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라고.

그는 죽음으로써 그의 사랑을 스스로 끝냈고, 동시에 그의 사랑을 가장 분명하게 그녀에게 드러낸 셈이다.

진부한 것만 같았던 이야기가 이렇게도 기이한 사랑이야기일줄이야.

생각을 이렇게 풀어놓고 보니 드라마속 덕만이 얼마나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사람인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비담이 얼마나 깊게 어렵게 엄청나게 덕만을 사랑했는지 새삼 곱씹어보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