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실이 죽었다. 덕만과 미실의 대립각이 <선덕여왕>을 이끌어가는 주축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래서 미실의 죽음이 가져올 드라마 스토리상의 타격은 컸다. 미실만큼 강력한 캐릭터로 덕만 내지는 덕만계 인물들과 대립할 인물은 이 드라마에 필연적이었다. 그렇게 비담은 필연적인 캐릭터였다.
개인적으로 비담이를 편애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가 스토리의 중심에 선 것은 반가운 이야기지만, 비담이의 캐릭터가 전무후무한 것이었기에 주축에 놓고 스토리를 전개하기엔 드라마를 쓰는 사람들의 부담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워낙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성격이었기에 그 캐릭터를 살리면서 스토리를 이어나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던 바였다.
그래서 그런건지, 미실의 난 때부터였나?.. 나는 선덕여왕을 정기적으로 보던 사람이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어느 선에서부턴가 비담이의 캐릭터는 전에 비해 많이 죽었다. 비담이의 매력은 섹시하기도 하고 또라이같기도 하고 야누스같기도 한 데서 오기도 했지만 그 여러가지 면을 모두 갖고 있다는 면에서 메리트가 다른 캐릭터들에 비해 더 대단한 것이었다. 유신과 알천을 보면 금방 드러난다. 그들의 성격은 전형적인 나라에 충성하고 전부를 던지는 그냥 그저그런 주인공을 위한 서브캐릭터에 불과하다. 알천은 유신과 유사할 뿐 고유한 매력을 찾기 힘들 정도이다. 작가의 취향인건지 중간중간 여백이 긴 장면들은 서브캐릭터들이 주는 진부함을 더한다.
이런 예가 대표적이다.
"덕만은.... 덕만은....!" 한참 끌다가, 다른 장면으로 눈길한번 줬다가 한참 후에서야 "덕만은 여인입니다!"
(대량 성악합창 음향 효과로 뭔가 엄숙하면서도 충격적인 분위기 조성)
하지만 비담은 첫 등장부터 그런 게 없었다. 동선도 컸고 대사도 툭툭 대담했다. 유신과 덕만을 보고 있으면 턱턱 막히던 느낌이 비담을 보고 있으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운명은 드라마 안의 그 어떤 캐릭터보다 입체적이었다. 게다가 가끔은 미칠듯이 외롭고, 가끔은 미친사람마냥 유쾌하고 이질적인 몇 가지의 성격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소화하는 김남길의 재발견을 외치며 나를 포함한 뭇 시청자들은 즐거워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실을 대신할 악의 축[?]으로서 비담의 역할이 분명해진 순간부터 비담이의 그런 매력과 캐릭터는 차갑고 비정한 옴므파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되버렸다.
티비에서 더이상 비담이의 요런↓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비담은 요런 애교를 떨지 않는다. 노려보거나, 정색하거나 그의 엄마를 닮은 듯 입꼬리만 살짜기 올리면 그뿐이다.
[두가지 이질적인 캐릭터 모두, 비담의 기구한 운명과 김남길 본인의 아우라와 잘 어울리면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었다.]
이렇게 캐릭터가 축소된 것은 덕만이 공주로서 인정받기 전후에 덕만이 겪었던 과정과 유사하다. 활발하고 때묻지 않으면서도 영리했던 덕만이가 언니 천명의 죽음이 충격으로 다가왔을 건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무튼 그 이후로 덕만도 가벼움을 버리고 제왕의 길을 엄숙하게 걸어가는 전형적인 캐릭터로 화석화되고 말았다. <선덕여왕>에 사람들이 열광했던건 미실과 덕만의 재기넘치는 경쟁뿐 아니라, 덕만, 비담, 미실, 조연인 죽방, 고도 등의 개성넘치는 캐릭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비범한 캐릭터 사이에 유신이 끼어있었기에 다소 평범하고 KBS 사극의 전형적인 주인공 스타일의 유신도 그 다양한 캐릭터중의 하나로 존재가치가 있었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캐릭터의 다양성은 말소시키고 대립각만을 부각시키면서 나는 선덕여왕에 대한 흥미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비담뿐만 아니라 춘추도 씁슬하지만 이 드라마의 모든 캐릭터가 밟은 전철을 이미 밟았다. 처음엔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청소년 시절을 말도 제대로 못 타고[못 타는 척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심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과 막연한 반항심, 그리고 어리지만 그 마음속에 불타고있는 야망으로 그려낸 것은 새로운 시도였고 승호의 빛나는 외모와 캐릭터가 절묘하게 조화되어 그의 등장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춘추는 유신과 비슷한, 이젠 여왕이 되어버린 덕만의 충직한 신하가 되어버렸다. 어느새 드라마는
선 vs 악의 구도, 한국 드라마의 역사만큼이나 길고 진부하게 이어졌던 그 구도로 돌아가고 있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다.
미실이 죽고 덕만 vs 미실 이었던 구도는 유신 vs 비담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정작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자 제목인 <선덕여왕>의 캐릭터는 어떻게 그려질지 미지수다. 물론 다양한 캐릭터 모두를 제대로 살릴 수 없는 작가들의 고충을 이해하지만 조금 더 고심하고 시청자를 배려해서 한국 사극에 획을 긋는 드라마로 남아주길 바란다. 시청률 때문에 연장방영 결정한 것도 사실 꼴사나워해 마지않던 한 사람으로서 연장방영을 한다면 연장된 회 만큼의 퀄리티로 시청자들에게 좋은 드라마를 선물해주길. 미실의 난 때 질질질질질질질 끌던 거 생각하면 울화가 터지지만 이제 어느덧 세번째 국면을 맞은 [덕만의 낭도 시절-공주시절-여왕시절이라고 치면, 연극으로 치면 3장이 열린 것이라 하겠다.] <선덕여왕>이 부디 초심을 잃지 않고 유종의 미를 거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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