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의 일이다. 예전에 친구 중 한 명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 나는 결혼 안 할거야. 어떻게 평생을 한 사람만 사랑하면서 살 수 있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아니 그렇다 정말로. 우리 엄마 아빠만 봐도 그렇다. 두분이 부부라는 인연을 맺고 지금까지 살아온것은 연인시절에 즐기던 그 설렘과 행복으로 똘똘 뭉친 사랑이라기 보다는 자식이라는 멍에와 이태껏 지켜왔던 안정을 깨고싶지 않은 타성, 그리고 얼굴 마주보며 그래도 살아온 정 때매문이겠지. 아마도 대부분의 부부들이 그렇기 때문에 요즘들어 수많은 부부들이 이혼을 하거나 바람을 피우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저히 이건 아니다.
남편을 사랑하면서 또!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 아내의 이야기라니.
난 이 책이 소설로 나왔을 때부터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 아내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데 [이런 X발!] 하고 욕을 했으면 했지 뭐 이런 내용을 소설로 쓴단 말인가. 그랬던 소설이 영화로까지 나왔으니 게다가 연애시대 이후로 내가 아껴왔던 예진언니가 주연이라니!! 도대체 이건 뭔가 싶었다. 그럼에도 그닥 구미가 당기지 않은터에 지은이가 손예진의 사랑스러움을 벤치마킹해야한다며 나를 무작정 끌고 이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보는 거의 모든 순간
나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7천원으로 이런 돈지랄을 내가 하고있어야하는건가.
매 장면마다 터지는 건 실소 뿐. 영화 내용 자체가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그 영화를 꿋꿋이 장장 두시간동안 보는 내 자신이 한심하기도 해서였다.
정말 벤치마킹하고 싶을 정도로 극중 인아는 사랑스럽다. 예전엔 청순하고 예쁘기만 했던 손예진의 미모는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예쁘다는 호칭보다는 아름답다는 호칭이 더 어울렸다.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겸비하다니. 이정도면 여신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셈이다. 이 영화는 그녀의 미모와 사랑스러움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한 영화는 아니었다. 누구나 좋아할만한 그녀이기에 덕훈 역시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동시에 불안했다. 그녀가 누구와 사랑에 빠질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불안한 연애생활을 청산하고 그녀의 사랑을 온전히 자기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하나!! 결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오산!! 결혼 이후에도 그녀는 넘치는 사랑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녀의 입장이 되서 말하자면, 그저 그녀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주는 것으로 행복을 얻고 싶었을 뿐이다. 그건 이세상 누구나 원하는 것이다. 사랑받고, 사랑을 주고 그로 인해 행복을 얻는 거.
남들과 인아가 다른 점은 단 하나.
그 행복에 내꺼와 니꺼의 경계가 없다는 것 뿐이다. 그녀는 덕훈을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만큼 재경도 사랑했다. 그녀에게 사랑은 소유가 아닌 존재 그 자체였다. 그녀의 말대로 두 사람을 사랑하고 두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은, 사랑이 반쪽이 되어서가 아니라 두배가 되어서인 것이다. 적어도 그녀에겐.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상식과 맞물릴 때 생기는 당혹스러움이다. 내가 경험한 것 역시 그랬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변할 뿐이었다. 누군가가 좋아지만 그동안 좋아했던 사람은 점점 잊게되고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한편, 새로 좋아하게 된 사람이 다른 곳은 보지 않고 오직 나만 볼 수 있게 더 가까워지고 싶어하고 소유하려고 하는 건 사랑을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습관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찌질하더라도 극중 덕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때, 쿨하게 그사람을 보내야 하지만 그 사람이 아직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어떻게든 내곁에 조금이라도 오래 두고 싶어서 매달리고 징징거리고 때론 협박까지 불사하는 것은 찌질하면서도 당연했다.
어쩌면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과 덕훈이 닮아있기 때문에 영화는 덕훈의 시점에서 돌아가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다. 만약 인아나 재경(두 사람 다 박애주의(라고 일단락짓기에는 좀 어렵지만 어쨋든 그러한 사랑방식)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다.)의 시점으로 영화가 전개되었다면 그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는 커녕 싸이코 영화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찌질한 노덕훈은 끝까지 사랑을 받고있는데도 계속 더 달라고 난리를 치는, 찌질한 노덕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거고. 그들은 보이는 게 곧 그들의 마음 전부였기 때문에 1인칭이 되든 3인칭이 되든 아쉬울 게 없었다. 하지만 덕훈의 시점이 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영화는 우리처럼 멀쩡한 인간 덕훈이 멀쩡하지 않은 사랑의 방식에 점점 수긍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던 거다. 사랑을 즐기라고. 내꺼, 니꺼, 따지지 말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사랑을 즐기라고 말이다. 마치 골대만 다르고 공을 신나게 차며 경기를 즐기는 프로들의 축구처럼. 프로답게 사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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