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가 변해버린 이영애를 떠나보내며 했던 유명한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쉬워해도 사랑은 변하기 마련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나서도 헤어지는 이유는, 그러고나서 쉽게 잊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그것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끝에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랑으로 그만큼 사람이 강해질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 사랑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면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애니스를 보고 느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들이 살면서 가장 자유롭게 잭다울 수 있고, 애니스다울 수 있었던 공간인 동시에 그들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버린 공간이기도 했다. 사실 난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스스럼 없이 잘 지내던 동료였던 두 사람이 마치 마법에 걸린 사람들처럼 그렇게 지독한 사랑에 빠지게 될 줄이야. 아마 당사자들 역시 그랬을 것이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아무리 좋아했던 사람이라도 오랜 시간 교류를 나누지 못하면 좋아했던 감정이 애틋함으로 변하고 애틋함은 아련함이 되어서 잊혀졌던 경험이 내겐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잭가 애니스에게 서로는 그렇게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서로가 헤어지던 순간에도 어쩌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거란 걸, 아니 만나야 한다는 걸, 만날 수밖에 없을 거란 걸 직감적으로 느꼈을 지 모른다. 현실에 부딪힐 수록 사랑은 잊혀지기는 커녕 사랑은 더욱 강해졌다. 헤어지던 날 서로에게 말한대로 잭은 로데오를 하면서, 애니스는 농장 일을 하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척하면서 마음 속으로는 서로가 찾아와주길 너무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기에 현실에 더 치열하게 파고들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너무 안타깝다. 그러다가 먼저 손을 내민 건 잭이었다.
생각해보니 잭이 늘 먼저였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상대방에게 먼저 묘하게 끌린 것도, 그곳에서 먼저 떠난 것도, 다시 돌아왔던 것도, 그리고... 먼저 자신의 사랑을 끝낸 것 역시 잭이었다. 애니스는 잭보다는 늦지만 더 오래, 더 깊게 잭을 사랑했다. 그의 사랑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평온해보이지만 깊은 곳에 열정을 품은 휴화산같았다. 그는 잭과 헤어지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척 잭을 다독이고 돌아섰지만 정작 힘들어하는 건 잭보다는 애니스쪽이었다. 상대방이 너무나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날, 잭은 다른 해방구를 찾아 그리움을 해소했지만, 애니스는 너무나 미련하게 그리움과 사랑을 속으로만 삭여냈다. 냉정한 척 멀쩡한 척했지만 그의 마음 속에 가릴 수 없을 만큼 깊고 아득한 사랑이 커져만 가서 이젠 감추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의 모습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배어나고 있었다는 걸 그는 느꼈을까? 애니스는 잭을 사랑할 수록 망가져갔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은 엉망이 되버렸고 잭은 부잣집 딸을 만나 어려움 없이 살며 아내가 눈치못채게 너무 쉽게 애니스를 만나러 왔지만 애니스는 아내와의 평화가 깨지고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겨운 생활고와, 그보다도 더 스스로를 얽매는 외로움과 싸워가며 겨우겨우 잭을 만났다. 그게 잭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랑을 끊어버리면 좀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사랑이 주는 힘에 기대어 다시 힘겨운 삶을 이어나가는 그의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인상깊었다. 사랑때문에 괴로워도 사랑에 기대어 살아가는 그의 삶 속에서, 사랑 역시 영원할 것임을 느꼈다. 사랑이 평생동안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더라도 그는 결코 그 사랑을 놓지 않을 것임을 느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람들은 대개는 잭이 챙겨뒀던 애니스의 피묻은 셔츠를 멋진 장면으로 꼽곤 한다. 애니스가 잭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멀어져간 그때에도 아니 그전부터 줄곧 잭은 애니스만을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는 흔적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브로크백에서의 이별 후 4년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이야기를 하는 쪽이 잭이고, 듣는 쪽은 애니스다. 잭이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를 늘어놓고, "And what about you?" 라고 물으니까 애니스는 짧게 대답했다. "ME? well,.... i don't know."
이 말을 듣는데 왜그렇게 마음이 짠한 건지. 내가 그래서 그런건지 몰라도. 그 대답에서 다 느껴졌다. 적어도 내겐,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몰라' 라는 말은 상대방에게 대답하고 싶지 않거나 정말 모르겠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 후로 한 순간도 널 잊은 적 없다고 줄곧 니 생각만 했다고. 니 생각을 제외한 모든 일들이 내겐 별 의미 없었다고.... 이런 말을 어떻게 해. 낯간지럽게. 그냥 "몰라." 하고 후 웃어버리면 그만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말 후 담배를 뻐끔 태우는 애니스에게서 나는 사랑을 봤다. 여운이 길다. 역시 이안 감독의 영화는 지독히 긴 여운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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