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간도와 상성.
[보시기 전에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 글은 스포일러성이 짙기 때문에 영화를 보실 분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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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강, 맥조휘 감독이 무간도 이후 간만에 선보이는 느와르 [상성]을 보면서 전작[무간도]에 비해 보다 중국적인 느와르가 무엇인지,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간도와 상성은 비슷한 점이 많다. 일단 유위강, 맥조휘, 양조위[아 그리고 귀여운 두문택아저씨!! 무간도 때보다 살이 많이 쪄서 등장했지만 귀여움과 어리버리함은 여전하셨다ㅋㅋ]의 만남이라는 가장 큰 공통점이 있고, 경찰이 등장한다. 심장을 터뜨릴듯한, 현이 끊어질듯한 바이올린 연주가 영화 전반의 긴장을 늦출수 없게 만들며, 홍콩 영화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화려한 영상미는 가히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었다. 사건이 얽히고 설키는 치밀함과 가파른 전개는 무간도에 비해 한 수 뒤졌지만 느와르라는 장르면에서 볼 때 손색없는 작품이었다. 흔히 이 영화를 들어 후반부로 갈 수록 긴장감이 떨어진다고들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건 [누가]살인을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왜]살인을 저질렀느냐이다. 범인은 처음부터 이미 유.정.희.라고 제시되어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게 진실이냐를 따질것이 아니라 도대체 그것이 왜 진실이어야하는지, 왜 그래야만했는지부터 되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갖고 영화에 집중했지만 그에 대한 답은 자뭇 너무나 뻔하고 간단했다, 복수. 그 슬프고도 잔인한 단어. 유정희는 그 두글자에 목메어 30년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의 복수는 탄탄대로를 걷는 듯 했지만, 후배형사였던 아방의 치밀한 조사로 뜻밖의 사실에 부딪힌다. 그가 마지막으로 복수하려고했던 숙정은 정작 복수의 대상이엇던 자의 친자가 아니었다는 거,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미 숙정은 한 사람의 딸이기전에 자신의 아내이고, 가족이라는 것이었다. 숨이 붙어있는 채 병실에 누워있는 숙정을 바라보는 정희의 눈빛은 정말 한 가지 감정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복수의 본질을 잃은 당혹감과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한번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랑 그 모든것의 총체인 것만 같았다.
여기서 살짝 삼천포로 빠져 양조위 눈빛 예찬론으로 잠시 들어가보자. 나는 그를 the name의 뮤직비디오로 처음 만났다. 중학교 때 봤던 거라 가물가물하지만서도 뮤직비디오의 후반부에서 그의 눈- 사랑했던 여인을 다시 만난 반가움과, 변해버린 그녀에의 변하지 않는 사랑, 그 씁슬함이 고스란히 담긴 그 눈은 아직도 내 기억에 너무나 선하다. 그때 담배 한대를 깊게 빨아들이곤 씩 소소를 머금던 그는 정말 멋진 배우였다. 그가 양조위라는 대배우인지 몰랐을 때 나는 [왜 저렇게 멋있는 사람이 지금까지 배우안하고 뭐하고 지냈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눈빛은 따뜻하면서도 씁슬했다. 마치 모닥불의 매운 연기처럼. 그를 그후로 [무간도]와 [화양연화], [해피투게더][천녀유혼3]에서 봤을 때 세월의 깊이가 켜켜히 쌓여 눈빛의 중후함을 쌓아가고 있다는 걸 볼 수 있었다. 시종일관 눈빛은 참 선하다는 느낌을 받았기에 그가 과연 이번 영화에서 악역이 어울릴 수 있을지 난 의심했었다.
그런데 이게 왠걸, 복수를 위해 장인의 집에 거침없이 들어선 그의 눈에는 냉기가 서릿발처럼 서있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건, 예고편에도 잠깐 나왔고, 영화의 후반부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조소嘲笑였다. 아 그게 스틸컷으로 남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오래전 봤던 the name 속 로맨티스트는 그 장면안에 없었다. 차갑고 외롭고 슬픈, 복수라는 불에 타들어가서 이젠 재뿐이 남지 않은 상처뿐인 야수만 남아있었을 뿐. 그가 훌륭한 배우라고 인정받을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담은 여기까지. 다시 영화로 넘어와본다. 사람이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을 때, 두가지 선택권이 주어진다. 복수와 용서. 인간은 그 갈림길 사이에서 수없이 고뇌해왔고 그 두가지 중 어느것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운명과 나라, 문화의 흥망이 갈리기도 했었다. 아방과 유정희 두 사람에게는 모두 씻기 힘든 상처가 있었다. 아방의 연인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낙태하고 자살했고, 정희는 어릴 적 끔찍하고도 슬픈 사건을 뼈저리게 겪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선택은 달랐다. 아방은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제 여자의 남자를 찾아가, 숨통을 끊어놓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를 내내 간병하는 길을 선택했다. 정희는 그 슬픈 기억을 제 머리속에 심어준 이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할 것을 결심했다. 누구에게도 잘잘못을 가리기는 어렵다. 아방이 옳은 선택을 했다 쳐도 그렇다고 정희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라고 비난할 수 없다. '정희가 아닌 누구였어도' 그상황에서 그러한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서, 그의 결심은 흔들렸다. 그는 너무 늦었지만, 너무 서투르지만 겨우 눈을 뜬 숙정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때 나도 모르게 정희의 용서가 제발 받아들여지길 바라고 있었던 것 같다. 제발, 제발.
하지만 현실은 차갑다. 우리가 좋아하는 통속 신파처럼 눈물 흘리며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정희의 간병에 힘입어 숙정이 나아 아들딸 잘 낳고 행복하게 산다는 해피엔딩이라면, 그건 현실도, 홍콩 느와르도 아닐 것이다. 정희가 숙정의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던 것처럼 숙정 역시 정희를 용서할 수 없다. 서로에게 너무나 서로가 소중한 걸 알지만, 그래서 정희를 미워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이해할 순 없다. 사랑할 수도 없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정희가 껴준 반지를 빼버렸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 정희에겐 더할 수 없이 큰 벌이 된 셈이다. 복수를 하고서도 행복하지 못해, 오히려 더 불행한 결말을 얻었으니. 아, 현실은 너무나 차갑다. 과연 정희가 그런 벌을 받을 만큼 잘못한 걸까.
여기에서 영화는 또다시 [무간도] 데자부를 이룬다. 제 목에 권총을 날리던 유건명, 제 머리에 권총을 날린 유정희. 아니, 진위강. 중국의 사고방식이란 결국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사람이다,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내가 유건명과 유정희를 가엾게 여기는 게 내가 감상적이어서만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를 냉혈한으로 만들어버린 건 과연 누구인가. 유건명에게 경찰도 삼합회원도 아닌 이중적 지위를 맡겨놓고 선악의 경계를 흐려놓은 것은 과연 누구인가. 영화는 안타깝지만 그 '누구'에 대한 처벌을 두 사람에게 떠넘겨 버렸다. 자기를 악으로 몰고간 이들을 처단함으로써 자기 자신도 악으로 빠져들어간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이미 선악은 그 정방향을 잃었다. 이곳이 바로 무간지옥인가.
상성, 킬빌, 그리고 마왕. 동양에서 전해오는 복수의 3중주.
그 나라의 문화를 알고 싶다면 그 나라의 복수극을 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동양은 특히나 그렇다. 무서운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들은 뭐가 그렇게 원한이 많은지, 살아서 슬펐던 사람들은 죽어서도 원혼이 되어 나타나 산 사람들을 괴롭힌다.
여기에서 나는 세 가지의 복수극을 소개할까 한다. 상성은 최근 개봉한 가장 중국적 정서와 홍콩영화의 대표장르쯤 되는 느와르 성격이 가장 두드러진 영화이다. 그리고 킬빌은 비록 이국의 감독에 의해 제작되었지만 그 복수의 방식에 있어 일본의 그것을 상당히 많이 차용해온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라마 마왕은 시리즈물이라는 점에서 두 영화와는 차이를 보이지만 작품성과 예술성 어느것에도 두 거장의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손색이 없다는 개인적 판단에서 선택했다. 이제 이 영화들의 복수에 대해 찬찬히 뜯어보자.
상성을 보면서 일본과 한국 그리고 홍콩 느와르, 이 세 가지의 복수 스타일을 함께 느낄 수가 있었다. 상성에서 가족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장면을 목격하는 진위강을 보면서 나는 얼핏, [킬빌]의 오렌 이시이를 떠올렸다. 이시이가 왜 킬러가 되었는지 브라이드의 내레이션이 곁들여진 애니메이션에서도 위강이 어릴 적 보았던 그 잔인한 가족들의 피살장면이 재현된다. 피로 시작된 원한은 피로 끝난다. 둘은 같은 방식의 복수를 선택했다. 이 방식에서는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그렇게 죽고 못살았던 [ぎり]義理가 한껏 드러난다. 킬빌의 포스터를 보라. 원색적인 노랑, 까망 배경에 보란듯이 그어진 선혈자국.
하지만 사무라이의 의리와 느와르의 복수가 다른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사무라이의 복수의 본질은 한없이 얄팍하다. 특히 킬빌에서 그려진 브라이드의 복수는 정말이지 무식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다. [내 인생 족쳐놓은 네 명의 킬러들을 만나 차례대로 죽여버릴거야!] 얼핏 동양의 신비스러움이 영화 중간중간 요긴하게 나오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양인들의 푸른눈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의 단면일 뿐이다. 중국의 복수극은 사연이 길다. 이 점은 한국의 그것과도 맥을 같이 한다. 참 그러고보면 복수하는 사람의 인생도 불쌍하기 짝이 없다. 장화 홍련은 억울하게 계모의 누명을 쓰고 죽었고, 폐비 윤씨의 피묻은 적삼을 보며 연산군은 얼마나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애증에 몸부림쳤던가. 한마디로 느와르의 복수는 사연이 길고, 결말은 잔인하다. 복수의 주체마저 비극으로 빨려들어갈 정도로. 사무라이는 글쎄, 그말만이 반복되어 내 입에서 나온다. 그들의 복수의 본질은 한없이 얄팍하다. 심지어는 자기가 살던 집에 찾아왔다는 것만으로 죽이기까지 한다.[주온을 보시라.] 그러면서도 복수의 강도는 너무나 잔인하다. 킬빌 말고 일본영화에서 그 복수를 확인하고 싶다면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을 참고하시길.
반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내가 우리나라 사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 나라 사람들의 복수란 참 소심하고도 담백하다. 장화 홍련은 결국 원님의 신원으로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한 뒤 저승으로 떠났다. 연산군은 말년이 좀 정말 불쌍해지긴 했지만. 전설의 고향을 봐도 그렇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복수는 결국은 용서로 귀결된다. 요즘들어 고전적인 스타일을 거부하고 내놓는 복수극 [달콤한 인생][친절한 금자씨]는 이것의 열외로 두기로 한다.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마왕]만으로 충분하다. [마왕]에서 승하의 복수는 빌을 죽이겠다고 일본검을 뽑고 설쳐대는 브라이드보다 잔인하고 무려 20여년 동안 복수를 계획해온 유정희보다 더 치밀했다. 그는 교묘하게 말려죽이는 복수를 감행한다. 자신의 손에는 먼지 한 번 묻히지 않고 오수의 소중한 사람들의 원한관계를 완벽하게 조종하여 그들을 파멸로 끌어내간다. 그러면서 차츰 오수마저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길 바란다. 그의 마지막 시나리오는 자뭇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오수가 자신을 죽임으로써 다시는 헤어나올 수 없는 살인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살기를 바랬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마지막은 형제처럼 나란하고 조붓했다. 서로를 용서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모두 죽는 슬픈 결말이지만 온전히 슬프다고만 볼 수 없는 건, 살아서는 지옥같이 살았던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마치 천국에 갓 도착한 나그네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휴 어깨가 너무 뻐근해서 마무리는 나중에 짓도록 해야겠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 맞다. 여기서 상성의 아쉬운 점 한 가지. 마지막 퍼즐 한 조각이 덜 맞춰진 기분이다. 유정희를 미행하고 집을 불태우려고 했던 리신화라는 놈은 도대체 뭐지. 그 퍼즐만 제대로 맞추어진다면 좋았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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