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의부스러기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timid 2007. 3. 31. 00:35

 

 영화를 보는 동안 지루했고, 보고나서의 기분은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난감할 정도로 묘-한 것이었다. 기분이 나쁜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편두통때문에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때그때 생각나던 것들을 정리해서 적어보고자 한다.

 

 처음에 그르누이를 보면서 아니 뭐 저런 병신같은 놈이 다 있나 싶었다. odor에서 scent까지, 그가 왜그렇게 냄새에 집착해야하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체취가 없다는게 뭐 대수인가. 나도 내 냄새를 모르겠는데. 그런데 언제부터였더라, 그르누이가 로라의 향기에 극렬한 집착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려가며 그녀를 쫓아다니던 때부터였나, 아니면 사형장에서 그의 죽음을 지켜보기위해 몰려들었던 성난 관중들이 어느새 향기에 취해 어쩔 줄을 몰라하며 서로에게 애무하는 무아지경 속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그르누이를 봤을 때부터였나. 그 병신을 이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 향기를 가지려고만 했을까. 향기는 굳이 갖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데. 처음 파리에서 만난 자두 파는 소녀에게 다가가 입을 막기 전에, 사랑할 순 없었을까. 그랬다면, 그랬다면 그르누이는 그 향기를 가질 순 없더라도 오래오래 맡을 수 있었을텐데. 사랑 없는 소유란 그렇게도 외로운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처음부터 혼자였다. 그의 엄마는 마치 생선머리 버리듯 아기를 탯줄을 자르기 무섭게 버렸고, 그가 있었던 자리마다 그의 이용가치가 다 하자 그를 버렸다. 그는 그렇게 혼자라는 것에 익숙해져버려서 자기가 혼자있기를 원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머리가 생각하는 것과 가슴이 느끼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인데. 체취가 없는 자신에 대한 충격과 환멸로 그는 최고의 향수를 만들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자기 발앞에 무릎꿇게 하겠다고 다짐했었지만 그의 야망이 현실화된 순간 그는 행복할 수 없었다. 혼자라는 게, 그 외로움이라는 것을 너무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헤어진다. 이름, 얼굴, 목소리 많은 것들이 헤어지고 난 후에도 서로를 기억하게 하지만 체취만큼 그 사람을 상기하게 하는 것도 드물 것이다. 체취가 없다는 건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중요한 열쇠 하나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로라의 체취를 가져가기 위해 산장에 들어섰을 때, 아무도 그가 그 자리에 몰래 들어왔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가볍고 날렵해서가 아니라 그르누이가 이세상에 존재한다는 증거- 체취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로라의 아버지가 날선 칼을 망설임없이 그르누이에게 던졌다면 차라리 죽으면서도 그르누이는 행복했을 것이다. 향기로 뒤범벅된 아우토반 속에서 향기를 가진 그르누이가 아니라 그르누이로서의 그르누이에 대한 심판이었으니까. 하지만 로라의 아버지마저 향기에 취해 그르누이에 대한 처벌을 포기했고, 그건 그 어떤 형벌보다 더 그르누이를 아프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아픔 앞에서 그르누이는 솔직했다. 그 아픔을 감추고 포장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굴종하는 것은 더이상 무의미하다는 걸 그르누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치유하는 방법을 그는 가장 '그르누이스럽게' 선택한다. 그땐 참 기분나쁜 결말이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영화 사상 가장 슬픈 결말이 아니었나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외로웠던 그는 살인자이기 이전에 perfumer였고 인간이었다. 불쌍한 사람. 그에게 필요한 건 기막힌 여인의 향내가 아니라 향기보다 아름다운 온기가 어려있는 포옹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미치광이 perfumer는 극단적인, 하지만 어딘가 우리와 닮아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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