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화, 홍련]을 감상한 직후 오프라인 플래닛에 생각나는 대로 꼴리는 대로 쓴 글을 다듬어 옮겨적음.
내가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멍청하지 않은 사람인 것이 일단 다행스러웠다. 죄책감과 질투, 집착과 사랑 그리고 일렉트라 컴플렉스. 여자라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한번 쯤은 느껴봤음직한 보편적 감정들을 버무려 김지운 감독은 슬프고도 무서운 그러면서도 전혀 천박하지 않은 수작을 만들어냈다.병든 엄마를 대신해 그 자리를 차지하러 온 아빠의 젊고 예쁜 새 애인 은주, 그녀의 등장에 더불어 비고의적이긴했지만 자기의 방관 때문에 엄마와 수연이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정하기 힘든 슬픔 속에서 수미의 마음은 격한 혼란을 겪게 된거다. 같은 상황에 서 있다면, 누구도 수미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수미는 수연과 엄마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은주에게 전가하려고 했다. 그건 사실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책임 회피이기도 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녀를 경멸했다. - 동시에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경멸하고 부정했는지도 모른다. 또한 비어있는 아빠의 옆자리를 자기가 가장 경멸하는 여자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는 부성에 대한 단순한 딸의 사랑, 그 이상의 것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수미는 아버지에게 딸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는 은주를 -부정하는 동시에 동경하고, 결국은 은주라는 사람을 자아 안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그녀는 새 애인을 데려온 아빠를 경멸하고 동생 수연이를 보호하려는 맏딸 수미인 동시에, 아빠, 그 이상의 사랑을 원하는 한 남자의 여자, 은주이기도 했던 것이다. 두개의 자아가 동의하는 것은 수연의 죽음에 대한 강한 부정 뿐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죄책감, 슬픔은 그렇게 지독하게 이미 그 자리에 없는 수연이를,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한 아빠를 사랑하는 동시에 혐오했다. 한 여자 속에 사는 두 개의 자아가 만들어낸 극단적 애증愛憎은 지독했다.
그녀 안의 은주는 그녀가 생각한 그대로, 선병질적이고 악랄하다. 엄마를 쏙 빼닮은 수연이 그녀의 눈에 예뻐보였을 리 없다. 반면 그녀 안의 수미는 변해버린 아빠로부터, 그리고 악랄한 새엄마로부터 수연이를 지켜야했다. 수연이는 이제 그녀에게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동생이었다. 두 개의 자아가 공존하는 음산한 집 안에서 수연이는 어쨋든 살아있었고, 수연이는 미움과 보호를 받는 존재였다. 그 두가지 대우에 대해 수연이의 태도는 늘 모호했고, 은주와 수미라는 두 자아는 극렬하게 대립했다.
" 누구야? 누가 그랬어?[수미가 수연이의 멍든 팔을 부여잡고 걱정스럽게 했던 말.]"
" 누구야? 누가 그랬어?[은주가 수연이의 책상 위에 찢겨진 자신의 사진을 보고 악을 쓰며 했던 말.]"
그 악몽같은 나날들의 끝에서 둘은 수미의 머리 속에 그려져있던 은주와는 다른, 현실의 이성적이고 침착한 은주와 대면하면서 산산조각나고 만다. 수미가 정신병동에 들어가고, 은주가 여전히 죄책감에 못이기는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다만, 어쩔 수 없었을 뿐이다. 누구나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공포란 것은 어쩌면 그렇게 어쩔 수 없는 극단의 상황 속에 우리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일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파편일 수 있다. 그땐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정처없이 걸어온 길이 뒤돌아보니 이렇게 슬프고 끔찍한 길이었을 줄이야.
이 영화에서 상징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냥 내가 내맘대로 또는 예-전에 한 네티즌이 썼던 글을 읽은 기억을 더듬어서 적자면, 다음과 같다.
초반부에 수미가 [수연이와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밤에] 가위에 눌리는 장면에서, 귀신이 하혈하고나서 그 속에 손이 나온 건[으으으 그때 침대위로 올라오던 긴머리에 검은 옷 입은 귀신 생각하면 아직도 후덜덜덜;;] 아빠[무현]에 대한 '은주'적인 애정과 집착이 극도에 달해있을 때, 그의 아이를 갖고 나서 유산했음을 의미한다. 그 날 아침 침대시트에 묻은 핏자국이 죽은 수연이의 것일 리 없다. 수미가 아이를 유산한 이후 첫 월경을 치뤘음을 상징한다. 아기를 유산했다는 반증은 영화 후반부에 은주가 혼자 무현의 가족이 살던 집에 찾아가 '문제의' 옷장을 열어보는 장면에서 리본과 함께 흘러나오는 묽고 걸쭉한-양수를 뜻하는 것 같은- 액체와 아기 울음소리라고 볼 수 있다. 이것만 봐도 이 영화에 감독이 기울인 정성이 얼마나 섬세한 것인지 알 수 있는데, 내가 무엇보다 이 영화에 감동한 건 색감의 대비를 통한 인물에 대한 묘사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은 뚜렷한 캐릭터를 갖고있진 않다. 모든 것이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다가 나중에 가서야 [아 그렇구나] 겨우 깨닫게 된다. 인물들간 대화 역시 영화가 끝날 때 쯤에야 모든 실마리를 풀고 나서야 이해하게 되기때문에, 대화를 통해 인물들의 성격이 어떤지 알아채기는 쉽지 않았다. 감독진은 그런 부족함을 미술로 보충했다. 인물을 대변하는 색채, 그리고 그들이 입는 옷감은 영화 전체의 색감을 풍부하고 화려하게 하는 동시에 관객들이 주목하고 갈 또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기까지 한다. 수연의 언니로서의 수미는 푸른색, 결백한, 그리고 죽은 수연을 대표하는 색은 흰색이다. 수미, 수연 자매는 대부분 같은 장면을 찍을 때 비슷한 색상의 옷을 입는 대신, 수미가 수연보다 더 분명한 원색톤의 옷을 입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는 수연이 수미의 환상 속에서 지어낸 모조품임을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둘의 옷은 소녀스러움을 강조하는 밝은 원색 계열에 귀엽고 자잘한 꽃무늬와 레이스 주를 이루고 있다. 반면 표독스러운 은주는 실크 소재의 화려한 붉은색 계통의 옷이 그녀를 대변했다. 도회적인 커트머리, 붉게 칠한 입술과 실크가 주는 화사함은 수미, 수연이의 소녀풍의 이미지와 분명한 대조를 이룬다. 죽은 엄마를 대표하는 색은 초록색이며, 현실 속 무현과 은주는 수미의 환상과 대비를 이루기 위해선지 무채색 계통의 옷을 많이 입었다. 특히 영화 내내 이성적으로 중립을 지키는 무현[김갑수]의 경우 그의 극중 이미지와 그레이 계통의 분위기는 너무나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또한 각자의 캐릭터에 맞는 색상은 집 전체적으로 풍기는 아르누보의 화려함-또는 자유분방한 아르누보 곡선 속에서의 불안함등과 잘 맞아떨어져 영화를 보고 나서 한 편의 멋진 전시회에 다녀온 듯한 느낌도 받았다. 탄탄한 스토리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시각미의 향연. [달콤한 인생]을 보면서 김 감독 영화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매력에 난 그저 언짢았는데, 이 영화는 분명했다. 내가 본 공포영화 중에 최고였다. 내가 본 어떤 영화 못지 않게 웰메이드무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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