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의부스러기

오랜만에 만나는 순하고도 진한 두유같은 드라마 - 결혼 못하는 남자

timid 2009. 7. 24. 12:18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말하고자 하면 끝이 없지만 그중에서도 드라마쪽을 생각해보자.

요즘의 문화코드가 그렇듯 요즘은 자극적이지 않으면 어떤 문화콘텐츠도 살아남을 수가 없다.

그런 자극제로서 섹슈얼 코드는 이제 너무나 보편화되어서

이젠 더이상 얼마다 더 자극적이어야 사람들이 감흥을 느끼고 관심을 느끼게 되는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극 중 남자주인공이 바람피는거야 이젠 예삿일이 되버렸고

여자주인공은 이에 질세라 맞바람을 피며 남자주인공의 막장대열에 동참한다.

심지어 등장인물 거의 대부분이 그런 비정상적인 연애를 즐기는 드라마도 있다. 정말 그 드라마 속 사랑은 "개나소나"이다.

그만큼 연애의 본질은 모호하고 행복하게 닭살을 떨거나 치열하게 싸우거나

연애의 겉껍데기에 치중할 뿐 그 속에 있는 사람의 감정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런 드라마는 당연히 백이면 백 산으로 가는데 사람들은 그 정신없는 요지경에 눈이 팔려 채널을 차마 돌리지 못한다. 욕을 하면서도 보고 있다.

이런 류의 드라마를 막장 드라마라고 한다.

막장 드라마는 자극적인 소재로 시청자들의 눈을 끌어 시청률 고도 상승구가를 누리고 

시청률에 눈이 먼 방송사들은 너도나도 그 아류작을 만들기 바쁘다.

은근하든 노골적이든 커플 사이의 스와핑(??)이란 것은 이제 드라마에서도 주로 사용하는 소재가 되버렸고

신데렐라 이야기 다들 식상해졌다 말하지만 좀더 잘 사는, 좀더 멋진, 좀더 대단한 왕자님이 등장할 수록

여자 시청자들은 열광하고 남자 시청자들은 모방한다. 구준표 소라빵머리랑 태봉이가 부른 네버엔딩스토리가 그에 대한 가장 여실한 반증이겠지.

 

아니면 스케일이 엄청 커서 시청자가 화려한 비쥬얼에 현혹되거나

드라마가 담고 있는 엄청난 이야기 규모에 압도되어 시청률을 높이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런 드라마는 대개 특별드라마, 내지는 창사 몇주년 특별기획 드라마라는 딱지를 붙이고

방송사가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만든 것으로 일종의 시청률 보증수표로서 자리를 굳혔다.

드라마가 성공하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만족해야 한다.

말초신경을 자극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이거나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스케일이 대단하거나.

 

 

그렇다.

언제부턴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실용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한 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깊은 생각을 권유하는 건 교육방송의 다큐멘터리 정도로만 남아버렸고

티비를 틀면 온통 뇌를 잠시 꺼놓고 봐도 될만한 단순한 스토리에 자극적인 소재를 찐-하게 버무린 드라마와,

생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버라이어티 쇼들이 즐비하다.

(물론 모든 버라이어티와 모든 드라마가 그렇다고 단정짓지는 않겠다.)

그런 정글같은 방송가에서 '결혼 못하는 남자'는 이제는 시청자들에겐 조금 낯설어진

너무나 순한 드라마이다. 

스토리 구성도 그렇게 기복이 크지 않다. 매일 있는 소소한 이야기 속에 등장인물의 자잘한 감정의 변화를 담담히 지켜보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시청자들을 지루하지 않게 하는건 캐릭터 하나 하나가 갖고 있는 매력이고,

그 매력이 평범한 사람이 갖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서 오는 공감 때문이다.

하나는 예외가 아니냐고?

물론 극중 지진희가 연기하는 조재희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특이하기도 하지만,

그의 성격을 조심히 뜯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어쩌면 우리가 숨기고 살아왔고 누구한테 이야기하지 않았던 면들의 집합체 같기도 하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듯하면서도 잘 모른다.

노처녀의 오지랍이 외로움을 잊기 위한 기제임을 너무나 쉽게 파악하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정도로 다른 사람에 대한 분석은 빠르면서도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아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다는 것을 모른다.

감정 표현에 서툴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종종 입히기도 하고 자기의 말이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 얼핏 위의 글만 읽어보면 싸이코패스같은 면이 있으면서도 조재희가 사랑스러울 수 밖에 없는 것은

그가 어린 아이처럼 때묻지 않은 순수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에 무지하다는 것을 드라마 저변에서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캐릭터 하나도 성격이 묻히거나 감정곡선이 시청자와 공감되지 않을 게 없다.

10년째 한 사람만 바라보면서 묵묵히 짝사랑을 이어온 기란도,

약혼자와의 파혼 후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연애를 하지 않게 된 문정도,

로맨틱한 사랑을 꿈꾸며 현실을 살아가는 유진도,

연애에 대해서 다 아는 듯 늘 서툴기만 한 현규도.

금쪽같은 내 자식이지만 결혼시키기 위해서라면 딸을 몰아치기 바쁜 문정의 아버지도,

과거엔 서릿발같았지만 차츰 약해져가는 재희의 어머니도,

집에선 자상한 척, 속으론 현실도피를 꿈꾸는 부원장도,

우리의 모습 또는 우리 주변에 있는 누군가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면서도 그렇게 자극적인 스토리 전개 없이 무난하고 순탄하게 드라마를 끌어온 것이다.

순하면서도 밍밍하지 않은 이 드라마. 2006년도의 <연애시대>를 연상시킨다.

물론 연애시대에 비해 등장인물들 모두 연애에 서투르지만, 그래서 이 드라마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은 것 같다.

서툴러서 겪을 수 있는 소소한 에피소드들. 우린 얼마나 그런 일들에 웃고 울었는지.

오히려 연애에 서투른 아마추어같은 그들의 모습이 내겐 더욱더 공감이 가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난 너무나 칭찬해주고 싶고 사람들에게 자랑도 해주고 싶은데

이런 드라마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지 않은 현실이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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