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느날 라디오가 말했다. 순간순간 명멸하는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착각하며 살지만 그건 행복이 아닌 단순한 즐거움일 뿐이라고 쓸쓸하지만 분명하게 잘라 말하는 디제이의 말이 내겐 꽤나 충격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그 때 기억이 났다. 즐거움이란 것은, 행복이란 것은 과연 뭘까. 사랑은 그사이 어디쯤엔가 자리해있을텐데.
이 영화 속 사랑은 독특하다. 주인공 사오리와 하루히코, 그리고 히미코라는 예명이 더 어울리는 사오리의 아버지와 돌아가신 어머니. 그 사이에 분명 사랑은 있었다. 하지만 [동성애]라는 이 영화의 중요한 소재는 네 사람의 감정의 경계 -연인간의 사랑과 그것이 아닌 사랑의 경계를 흐렸다. 뭐라 딱 잘라 설명하기 힘든 감정, 이누도 잇신 감독은 그런 감정을 다루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같다. 예전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봤을 때에도 그랬다. 표면적으로 보면 '저러면 안되는거 아닌가? 미쳤어!' 고개를 젓게 될 수도 있는 줄거리지만, 감독은 그안에서 인물들의 내면을 감독은 놀랍도록 섬세하게 그려냈다. 여느 멜로드라마들처럼 명대사 따위를 남발하는 것보다 일시정지한 듯한 잠깐잠깐 침묵하는 화면 속에서 더 진하게 인물들의 숨이, 심장박동이, 감정이 묻어나왔다.
-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 보실 분들은 읽지 마세요.
사오리와 하루히코, 클럽에서 어느 커플못지않게 행복한 얼굴로 춤을 추던, 너무나 잘 어울리던 두 사람. 언제부턴가 둘은 서로의 눈에서 느꼈을 것이다. 서로의 눈에 맺힌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이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서기엔 보이지 않는 벽들이 많았다. 하루히코는 게이였고 사오리는 게이 아버지에게서 버림받고 힘들게 살아온, 그래서 게이를 누구보다 증오했던 여자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히코는 사오리의 아버지의 연인이었다. 다가가려 애써도, 아니 애쓸 수도 없고 멀어질 수도 없는 이상한 인연의 끈에 묶인 두 사람. 방에 홀로 남은 둘은 마치 처음 사랑해보는 사람들처럼 어색하게 키스했다. 사오리는 키스하는 잠깐잠깐 눈을 떠 하루히코의 눈을 직시하곤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 자체에 행복을 느끼고 싶어 그녀는 눈을 다시 감고 그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끝내 그를 밀어내고 만다. 하루히코가 자기 감정을 확신하지 못했다. 사오리 역시 그것을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누가봐도 확실하지 못했다. 단지 오랫동안 연인을 병간호하면서 식었던 열정을, 채우지못했던 허전함을 사오리로부터 회복하고 싶어서인건지, 아니면 정말 사오리를 사랑하는 것인지. 그리고 사오리 역시 둘 중 어느 것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하루히코는 어쩔 수 없는 게이이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성적인 매력이 아닌, 그저 열정을 찾기 위한 수단을 원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아버지의 남자였다. 사오리는 '메종드 히미코'에 머물면서 용서할 수 없는 그를, 손조차 만지기 싫었던 게이라는 종족들을 적어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이 내용은 개인적으로 참 인상깊었기에 다음 포스팅에서 더 다루도록 하겠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살았을 줄 알았던 어머니가 이따금씩 아버지의 게이바를 찾았단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편으로 그렇게 아버지를 사랑했던, 또는 이해했던 어머니에게서, 하루히코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사랑하고 싶지만 그녀 자신을 위해서는 사랑해선 안 되는 사람이 아버지이고, 또 하루히코라는 걸 그때 알았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아무 미련 없는 사람처럼 그녀는 메종드 히미코를 떠났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해 애썼다. 그녀는 아버지 히미코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하루히코를 사랑할 수도 없었다. 히미코가 죽고나서도 그녀는 메종드 히미코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버지란 존재가 그곳에 없으니 그녀에겐 그곳에 머물 더이상의 이유도 없었고 하루히코는 옛 애인이 죽었으니 이젠 훨훨 새 (남자)애인을 찾아 떠날 거였다. 둘은 서로에게 더 이상의 미련을 둘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거기서 불쑥 하루히코는 입을 연다.
- 얼마전에 호소카와 씨랑 밥먹었어, 잤다면서? 그사람이랑. 엄청 취해서 무지 자세하게 이야기해주더라. 좀 부럽더라고.... 너 말고, 호소카와씨.
그 말에 참았던 눈물을 꾸역꾸역 흘리는 사오리를 두고 다시 볼 일이 없겠다고 버스가 오자 휑하니 가버린다. 이제와서 뭘 어쩌란거야. 나쁜 놈.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혼자 그렇게 생각했다.
[사오리가 보고싶어, 피키피키핏키_☆]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이 낙서 앞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난 쉽게 예상하기 어렵다. 그 이후의 이야기야 관객들이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둘은 언젠가는 사랑하게 되고 또 헤어져서도 친구처럼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아마도 그럴 것 같다. 보이기에 가난하고 이상해보여도,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오랫동안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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