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의부스러기

아주 오래된 설레임, -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

timid 2008. 4. 24. 12:59

 

 

 

트렌디 드라마는 머리가 커지면서 안 좋아했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면.. 중학교 1학년 때 난리가 났었던 장동건, 채림 주연의 [이브의 모든 것]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장동건같은 미남 배우가 싫은건 전혀 아니고 그렇다고 채림이 미운것도 아니었다. 그냥 채림이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김소연보다 착하다는 이유로 또는 김소연이 너무 못되었다는 이유로 능력있는 김소연이 아니라 평범한 채림이 잘생기고 능력있는 장동건과 만나 행복하게 잘 산다는 건 너무 어이없는 설정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불쌍한 인생을 산 건 김소연인데, 기억을 잃고 최고의 아나운서의 자리에서도 나와 천사같은 바보가 되었다는 것도 화가났고. 그런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도 웃겼지만 드라마에 목메는 시청자들도 웃겼다.

 

그 이후로 트렌디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았다. 최근에 본 신데렐라 드라마는 [파리의 연인]이었다. 그 드라마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전에 트렌디드라마를 좋아했을 때랑은 다른 생각을 갖고 봤다. [파리의 연인]은 90년대 쏟아져나왔던 트렌디드라마의 정형을 충실히 따랐다. 설정이 어줍지 않고 아예 그 모양을 그대로 본따 만든데다가 김정은, 박신양, 이동건. 모두 그 배역에 꼬옥 맞는듯 캐릭터를 소화해낸 덕에 몰입해서 볼 수 있었고. 나는 그당시 누군가를 무지 짝사랑하고 있었기에 김정은과 박신양의 신데렐라 러브스토리보다 이동건의 도저히 계산이 안맞는 [아무리 봐도 이동건이 훨씬 어려보이고 잘생기고 능력도 있는데!!! 지가 뭐가 모지라서 저런 여자를 짝사랑하는 것인지] 청승맞은 순정에 동감하며 봤다.

 

 

그리고 몇년이 지나서 이 드라마를 이번 주말에 처음 봤다. 이 드라마는 내가 아무것도 모르던 초등학생때, [사랑은 그대 품안에][별은 내 가슴에]를 보면서 느낀 아주 오래된 설레임이 날 찾아온 기분이다. 그 설레임은 늙기는 커녕 소녀들의 환상을 고스란히 살리는 동시에 현실성이라는 옷을 살포시 입어주어 유치함을 버렸다. [내생에 마지막 스캔들]은 그런 드라마이다.

 

버리지 않은 트렌디 공식 하나.

최진실은 죽지 않아 vs  정준호의 재발견

90년대 최고의 탤런트로 손꼽혔던 최진실. 그녀는 귀여운 소녀 이미지였다. 옛날 롯데껌 광고를 봤던 기억이 나는데, 무척 어렸을 때임에도 그때 최진실의 미소는 쥬시후레쉬향이 나는듯 상큼했던 기억이 난다. 늘 트렌디 드라마 속에서 구박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사랑을 얻어가는 예쁜 주인공으로 나왔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진화하게 될 지 사람들은 귀추를 주목했었고 그녀는 그런 그들에게 넓은 연기폭으로 가벼히 응수했다. 그렇게 톱스타의 자리를 굳힐 무렵 그녀는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활동을 줄여나갔다. 두 아이를 낳고 잘생긴 연하남편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이게 왠걸, 그들의 이혼은 세상에 일파만파 퍼졌고 그 이유조차 좋지 않다는 게 온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녀가 입을 마음의 상처는 지대했고 그녀가 과연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다들 의심해 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역시 그녀였다. [장밋빛 인생]에서 뽀글머리에 늘어진 티셔츠, 몸빼바지를 입고 그녀는 생활고에 찌든 주부역할을 확실하게 소화해냈으며, 사람들의 귀추가 주목될 수록 드라마의 흐름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줄 아는 영리한 배우였다. 결국 2005년도 KBS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고 그외에도 MBC에서 일일연속극을 하며 그녀가 건재함을 보여왔다. [내생애마지막스캔들] 역시 그녀의 존재감을 여지없이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작품들과 차별화를 이루는 것이라면, 그녀가 90년대 소녀의 모습을 아직 잃지 않았다는 걸 강하게 시청자들에게 어필했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녀는 자기 나이에 솔직한 배역을 선택해왔다. [그대, 그리고 나] [장미와 콩나물] [장밋빛 인생] [나쁜여자 착한여자] 등등이 그런 선례였다. [내생애 마지막 스캔들]에서도 그녀는 평범한 아줌마이지만, 톱스타 송재빈이 장동철이었을 시절, 열아홉살 첫사랑의 풋풋함을 잃지 않고 나이든. 씩씩하지만 여린 구석이 있는 그리고 가끔 귀엽기도 한 홍선희 역할을 맡았다. 신데렐라 드라마의 전차를 그대로 밟으면서 변칙을 주고있는 이 드라마에서 그녀가 갖는 존재감이란 실로 크다. 나이든 소녀의 유치하지 않은 로맨스를 현실적으로 그려내는데 그녀는 정말 적격인 배우였던 것이다.

 

이제 정준호의 이야기로 넘어가볼까?

그동안 그가 찍어온 영화와 드라마는 정말 많다. 그가 찍은 것 중엔 흥행한 것도 많고, 실패한 것도 많다. 여기에서 그의 흥행작들의 공통점을 찾자면, 첫째 그는 그를 원톱으로 세운 영화에서보다 다른 배우-특히 여자배우들과 함께였을 때 더 빛을 발해왔다. 둘째, 사람들은 잘생기고 훤칠한 그의 완벽한 모습보다는 그 완벽한 외형에서 가끔 저질러주는 비뚤어짐의 매력에 열광했다. 정웅인과 정운택 없이 그 혼자 나왔다면 [두사부일체]가 그만큼의 성공을 거두었을까? 만약 그가 [대부]에서처럼 무게 잡는 조직폭력배로 나왔다면? [가문의 영광]은 어떠한가. 그는 영화에서 가진 걸 다 갖춘 엘리트이지만 예비처가가 될 조폭들 앞에서는 맥을 못추는 소심한 남자일 뿐이다. 그의 곁에 김정은이 있음으로해서 그의 코믹함은 더 빛을 발했다.

[내생애마지막스캔들]속 송재빈 역은 그런 그의 특성과 딱 맞아 떨어지는 역할이었다. 드라마 속 그는 정말로 사랑스럽다. 예나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준수한 외모에 톱스타라는 지위는 그를 한층 고급스럽게 어필하는 반면,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경우 없는 떼를 쓰기도 하고 아이같이 순수해지기도 한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에 그 진중해보이는 눈을 반짝이며 중저음으로 한마디 뱉을 때, 어느 여자 시청자들이 쓰러지지 않고 견딜 수 있겠는가? 그는 적당히 망가지면서도 고유의 멋을 놓치지 않는다. 동시에 최진실과 호흡을 잘 맞추어가며 한 회 한 회 안정적으로 극을 진행해나가고 있다. 이런 둘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높은 시청률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버리지 않은 트렌디 공식 둘.

무심한 듯 시크한 영상들. 뻔하지만 시청자를 설레게 만드는 대사들,

 

이 장면을 기억하는가?

 

 

 

 

난 이때 이 드라마를 제대로 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최진실이 곤경에 처하는 걸 막기위해 정준호가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꼭 안아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정웅인이 다가와 자기가 입고 있던 자켓도 덮어준다. 정준호의 품에 안긴 게 최진실이 아니라 나라면. 캬.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장면 아닌가. 나를 지켜주기 위해 체면을 불사하는 두 남자. 드라마는 도처에 이러한 장치를 배치함으로써 시청자들의 여심을 사로잡는다. 저번주 일요일에, 홍선희의 집에 불쑥 찾아온 재빈이 잠이 안온다며 선희의 무릎베개에 무심한듯 능글맞게 누운 장면이 그랬다. 그럴 듯한 상황에서 예상은 했지만 밉지 않은 남자주인공의 매력에 시청자들은 한수 물러서고 만다. 느끼한 대사도 같은 종류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전혀 느끼하게 느껴지지 않는건 왜일까!] 이 드라마는 90년대 트렌디 드라마에 열광했던 세대들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까다로운 요즘 시청자들의 입맛에도 '현실적인 컨셉'으로 맞춰가면서 인기를 끄는 것이다.

 

 

다른 드라마와 차별화를 이루는 이 드라마의 변칙 하나.

 

중년 '풀하우스', 이혼녀와 노총각 만나다.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말할 때 흔히 [중년 풀하우스]라는 말을 쓴다. 나도 옳다구나 싶었다. 식모처럼 톱스타의 집에 살면서 그에게 밥을 지어주고 돌봐주는 귀여운 여자와 그녀에게 점점 빠져들어가는 남자의 이야기. 이드라마는 예전 풀하우스의 한지은과 이영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송재빈과 홍선희는 그들처럼 사소한 일로 토라지고 싸우지 않는다. 유치하게 인신공격을 하거나 상대방의 가족편에 들러붙어 동정심을 호소하지도 않는다. KBS에서 방영했던 풀하우스가 다소 유치하고 억지스런 설정으로 몇몇 까다로운 시청자들에게 외면을 받은 반면 이 드라마는 유치함 대신에 그럴 듯한 전개를 탄탄하게 이끌어나가면서 현실성이라는 중요한 요소도 잘 챙겨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드라마와 차별화를 이루는 이 드라마의 변칙 하나.

 

우리가 잘 아는 혹은 잘 알지 못하는 연예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우린 연예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매주 각 공중파에서 한번씩 연예뉴스를 해주는데도 우리는 거기서 찝어주는 연예인들의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들의 진짜 일상생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요즘 사람들이 리얼 버라이어티에 집착하는 것 아닐까? 그들의 쌩얼, 그들의 진짜 성격을 알고싶지만 알 수 있는 방법이 고작 정해진 루트를 따라 움직이는 버라이어티 쇼를 통해서만 한정되어있으니 그것이라도 보면서 스타에 대해 더 알고싶기 때문에 말이다.

이런 점에서 남자주인공이 연예인이라는 건 시청자들을 매료시키는 좋은 요인이 될 수 있다. 포장되지 않은 송재빈의 삶속에서 사람들은 '정말 톱스타라면 저렇게 살 수도 있겠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것이다. 연예인으로 성공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자기 아이를 남의 아이로 속인다거나, 사적인 복수를 위해 대형기자회견을 연다거나 하는 식의 이야기는 실제 연예인들도 저러지 않을까 하는 묘한 호기심을 품게 한다.

 

 

이러저러한 면에서 [내생애마지막스캔들]은 영리한 드라마다. 트렌디 드라마가 아무리 뻔하고 식상하더라도 이 드라마를 챙겨볼 수 밖에 없는 한 시청자의 궁색한 변명쯤으로 치부해도 좋다. 하지만 드라마는 진화해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뻔한 스토리로 제작비 죽이고 시청료 죽이는 드라마들은 이제 가라. 미리 계산된 드라마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내생애마지막스캔들]은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