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르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 때 묻곤 하지. 왜 프랑스 지도 위의 표시된 검은 점에서 가듯,
창공에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하는 것처럼,
별에게 가기 위해선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서는 별에 갈 수 없다.
증기선이나 합승마차, 철도등이 지상의 운송수단이라면
콜레라, 결석, 결핵, 암 등은 천상의 운송수단일지도 모른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겠지.]
빈센트가 별이 빛나는 방르 그렇게 즐겨 그리고, 동경했던 건, 그리고 갑작스럽게 죽음을 선택했던 건 별까지 서둘러 가고싶었기 때문일까? 가난과 고독에 시달려야해는 지상보다 행복한 천공의 별빛 속으로 가고싶었떤 순수하고 열정적이던 영혼을 만났다. - 2월 13일 불멸의 화가 반고흐전에 다녀왔다.
(이 글은 그때 쓴 감상문을 약간의 그림을 첨부하여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다.)
19세기 말엽 사진기가 발명되었다. 기억하고 싶은 장면이나 인물이 있다면 '펑'하고 찍혀나오는 사진기가 있으면 그만이었다. 굳이 화가에게 그림을 주문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시 말해 그림은 사실의 기록으로서의 기능을 사진으로부터 빼앗긴 셈이었다. 물론 그림의 모델이 되어줄 피사체는 귀족이나 부자가 아니고도 많았지만 화가들이 물질적인 지원을 받으며 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 팔아야했다. 그래서 살롱전에는 최신 부르주아 취향의 장식적, 신고전주의적인 그림이 출품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바로 인상주의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사진기가 인간의 눈의 구조를 그대로 본떴다는 것에 주목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진에 찍혀나와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우리 눈이 본 그대로일까? 눈은 정말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만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들은 사람들의 주관적인 시선에 주목했다. 시선을 임의적이고 주관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빛이었다. 나뭇잎이라고 해서 언제나 초록색인 것은 아니다. 햇빛이 비춰오는 방향에 따라 검은색이 되기도 하고, 노란색이 되기도 한다. 같은 빨간 사과라고 해도, 파란 테이블에 올려놓느냐, 다홍색 테이블에 올려놓느냐에 따라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 바닷물색이 과연 파란색일까? 파도에 부서지는 물보라속엔 바닷물과 햇빛과 바닷속 암초의 색까지 모든 것들이 녹아있다.인상파 화가들은 피사체를 자세히 뜯어보기도 하고 멀리서 흐릿하게 바라보기도 하면서 색채묘사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감행했다. 이들의 참신하고 부던한 노력은 유럽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얼었고 현대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대열의 선두에 고흐가 서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처음부터 인상파화가였던 것은 아니다. 그의 초기작품은 다소 무겁고 경건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의 화풍은 당시 인상파 화가들의 것이라기보다는 렘브란트나, 자연주의종파의 것과 흡사했다. 하지만 그의 그림관은 그때부터 타성에 젖어사는 여느 화가들과는 달랐다. '인물을 잘 표현하는 일을 얼굴 생김새를 닯게 그리는 문제가 아니라 전반적인 느낌을 전해주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 아카데미의 인물화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잘 구성되어있다. 더이상 고칠곳이 없고, 실수 하나 없이 매끄럽게 그려졌지. 그러니 그이상 잘 그릴 수없다는 점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그런 그림은 우리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끔 이끌어주진 못한다. 밀레, 레르미트, 레가메이, 도미에 등이 그린 인물은 그렇지 않다. 그들도 물론 구성을 잘 했지만 아카데미가 가르치는 방식은 아니다. 인물이 아무리 아카데미식으로 옳게 그려졌어도 현대회화의 특징인 개인적이고 친밀한 행동과 느낌이 결여된다면 앵그르가 그렸을지라도 피상적인 그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인물이 더이상 피상적이지 않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그건 땅을 파는 사람은 땅을 파고, 농부가 농부답고, 시골 아낙이 시골 나가 다울 때다.(중략)그것이야말로 현대예술의 진수이고, 그리스에서도, 르네상스시기에서도, 옛 네덜란드 화파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 1885년 7월 누에덴에서 테오에게 쓴 편지 중'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표현하려는 그의 노력과,고된 육체노동에 지친 농부와 노동자를 바라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이 맺은 결과물은 [감자먹는 사람들]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두침침한 집안, 중앙에 있는 등불로 농부들의 얼굴이 비춰지고 일을 마치고 돌아온 그들은 서로의 눈조차 마주치기 힘들 정도로 지쳐서는 감자를 먹으며 하루를 정리한다. 그들의 얼굴엔 주름이 빛을 받아 도드라지고 손등은 남녀할것 없이 거칠다. 빛은 중앙에 위치한 등불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에서 뭔가 온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빛과 함께 비벼지는 수증기가 화폭에 번져있기 때문일텐데, 그림이 너무 절망적으로 보이지 않길 바라는 빈센트의 배려때문일 것이다.
한편, 그림 정중앙에 배치도니 소녀의 뒷모습은 파격적인 시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자리가 비어있었다면 화면은 지나치게 밝아졌을 것이고, 정면으로 배치되었다면 소녀의 시선을 어디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졌겠지만 평면적인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뒷모습만을 보여줌으로서 나머지 네 명을 더 부각시키고 쓸데없는 묘사를 최소화하면서 화면에 입체적인 느낌을 더해준것만 봐도 그눈 이때부터 예사 환쟁이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던 그해 11월, 빈센트는 도시풍경과 인물화를 그려 생계를 꾸릴 작정으로 파리로 떠난다. 여기서 그가 만난 인상파 화가들은 그의 그림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그곳에서 그림에 넣어야할 또하나의 가치를 찾은 것이다. 지난날 농부들을 그리며 그림에 있어야할 진정성을 연구했다면 여기서 그는 색채라는 중요한 요소에 눈을 뜨게 된다. 이 시기 그가 많이 그린 것은 꽃이 있는 정물화였다. 화사한 색들이 어떻게 조합되었을 때 무슨 색이 강조되고 무슨 색이 후퇴되어보이는지 모델을 들일 돈이 없어 인물화를 적게 그리는 대신 자화상과 정물화에 노력을 쏟으면서 여러가지 색채에 대한 실험을 이어갔다. 파리 신흥화가들의 그림만큼이나 그에게 영향을 준것은 일본 판화 우키요에였다. 강렬한 원색에 포인트를 가미하여 그리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원근감과 강한 인상을 남기는 우케요에의 영향을 받아 그의 그림 속 색깔은 더욱 화사해지고 다양해졌다. 노란 밀밭을 그렸다 해도 그가 그린 밀밭그림에는 화폭에 담을 수 있는 모든 색깔이 담겨져 있었다. 색채에 대한 연구열정은 그를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남부 프랑스 아를르로 이끌었고 여기서 그는 많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그곳에 새로운 화가집단을 만들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어렵게 시작한 고갱과의 동거가 불화로 마찰을 빚게되고 그전부터 있어온 신경과민 증세가 악화되면서 그의 꿈은 좌절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그림활동은 고난이 겹쳐올수록 더 뜨겁고 빠르게 성숙의 경지에 올랐다. 끝없는 작품과정속에서 그의 몸과 마음은 지쳤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은 더없이 뜨거워졌다. 물질적으로 빈곤했고 정신적으로도 늘 황폐한 상황에서 그림에 대한 의지를 이어나가는 것은 얼마나 어려웠을까. 그림은 그가 정상적으로 살면서 영위할 수있는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갔지만 대신 그럼에도 죽지 않고 살아가게 해줄 예술가로서의 영감과 열정을 허락했다.
'이곳 사람들이 그림에 대해 갖고 있는 다소 미신적인 생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나를 슬프게 한다. 사실 그 말은 꽤나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빠져있느 사람이라서 다른 것을 잘 움켜쥐지 못한다는 말.'
- 1889년 12월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당시 빈센트의 그림은 파리에서 서서히 명성을 얻고있었던 반면, 그의 병은 점점 악화되었고 테오는 형을 너무나 안타까워했다. 형이 이렇게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제 겨우 사람들이 알아주기 시작했는데, 정작 형은 죽음같은 고통을 겪으며 병마와 싸우고 있으니 말이다. 이맘때쯤 테오가 빈센트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형을 사랑하고 그의 예술적 능력을 신뢰하는 테오의 진심이 편지속에 가득 묻어났기 때문이다. 빈센트가 화가로서 살 수 있었떤 건 고통으로 빚어낸 그의 열정과 그를 뒷받침해주는 동생의 따뜻한 배려때문이 아니었을런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고흐의 그림은 혼자 겪은 외로움과, 나머지 절반이 동생의 아낌없는 지원이 그려냈다는 사실.
한편, 빈센트는 정신병원에서 나와 네덜란드와 근접한 북부 프랑스로 요양을 떠났다. 그의 그림은 이제 고흐 특유의 느낌을 풍길 정도로 안정되어있었고 색채에 대한 그의 탁월한 안목이 그림속에 조화롭게 녹아들었다. 하지만 테오와 경제적인 문제로 다툰 후(그 이유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없지만)그는 며칠 후 밀밭에서 권총자살을 시도한다. 당시 그가 그린 작품이자, 그의 마지막 작품인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첫인상부터 불길하고 혼돈스러운 이미지를 풍기는데, 그의 마지막 날들을, 그때의 마음을 표현한게 아닌지 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추측할 뿐이었다.
<오베르-쉬어-와이즈로 요양와서 그린 닥터 가셰의 초상. 그림엔
그가 초기에 그렇게 원하던 인물의 개인적인 느낌이 느껴지는 동시
에 색채적으로 전기 작품들에 비해 안정된 모습이 보인다.>
올 겨울방학에 나는 빈센트와 좀 더 친해진 느낌이다. 예전에도 그의 그림을 좋아했지만 단순히 그를 자기 귀를 자른, 그림을 그리다 미쳐버린 이상한 화가쯤으로 생각했는데, 그가 테오에게, 동료화가에게,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본 그는 현명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졌으며 현실과의 괴리에 괴로워하지만 자기 열정을 숨기지 않았던 멋진 화가였다. 그런 사람이 그린 그림이기에 그의 그림은 더더욱 가치를 인정 받아 마땅하다. 별안간 진창같은 현실을 딛고 별에게 가버린 그가 진심으로 평안하기를 기도해본다.
'화가의 의무는 자연에 몰두하고 온힘을 다해서 자신의 감정을 작품속에 쏟아붓는 것이다.
그래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된다. 만일 팔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면 그런 목적에 도달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건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행위일 뿐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결코 그런짓을 하지 않는 다. 진지하게 작업을 해나간다면 언젠가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게 된다.'
- 마치 화가로서의 자기 의지를 스스로 다짐하는 것으로 보이는, 1882년 7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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