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인상주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timid 2006. 8. 17. 14:05

 

한길아트, 제임스.H 루빈의 [인상주의]

 

독후감.

 

 

인상주의가 발흥할 시점의 파리는 여러 예술 사조들이 함께 태어나고 부딪히느라 생기가 넘치는 젊은 도시였다. 초기에 인상주의는 사실주의의 아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주의와 다른 성격을 갖게 되어 새로운 사조로 분파되었다. 여기서 사실주의에 대하여 잠깐 짚고 넘어보자. 화가로서는 구스타브 쿠르베와, 평론가로서는 에밀 졸라가 사실주의의 대표주자였다.  "ㅡ주의(-ism)"라는 것[예를 들어,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같은 것들]은 예술가들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을 옹호하는 평론가들 역시 포함된다는 것을 알고 넘어가자. 사실주의자들은 미술이 기질[器質:organ, 정확하게 말하자면 화가의 이성(reason)]을 통해 눈에 보이는 자연[nature: natural science(자연과학)에서의 '자연'의 의미가 강하다]을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The Painter's Studio; A Real Allegory


쿠르베의 작품 [the painter's studio]는 사실주의 화가들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림으로 잘 형상화되어있다. 그림은 중앙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쿠르베를 중심으로 좌우가 나뉘어져있다. 우리가 보는 시각에서,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쿠르베의 모델들이다. 반면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 모델들이 쿠르베의 붓으로 형상화되어 그림속에 재생된 모델들의-나아가 당시 파리 시민들의 보다 더 사실적인 모습에 가까워졌다.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빠르게 산업화가 진행되어가는 파리 속에서 소외받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에 가깝다. 이것이 현실이며, 화가의 이성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사실주의 미술의 본질이다. 인상주의는 처음,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지만 처음부터 [사실주의=인상주의]이런 식의 도식이 성립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살롱전에 당선되는 고전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그림과 그러한 그림들을 옹호하는 고전주의자들에 저항적이었다. 인상적[impressive]이라는 말도, 이들의 저항적인 그림을 고전주의적인 심사위원이나 평론가들이 비꼬는데에 사용한 표현에서 왔다. 그들의 표현은 그만큼 고전주의적인 작품과는 차별화되었으며 색체, 구도, 주제 등 전체적인 면에서 기존의 것보다 대담하고 참신했다. 평론가 샤를 보들레르는 그들을 옹호했다. 그가 옹호한 인상주의의 성향은 비록 인상주의가 사실주의에서 나온 분파이긴 하지만, 사실주의의 그것과는 상이한 것이었다. 보들레르가 주목한 것은 미술이 형성되는 과정에 모델이 되고, 본질이 되는 자연, 또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기제[화가의 이성]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 다시 말해 자연을 바라본 화자의 망막에 맺힌 인상[印像],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화가의 이성에 따라 주관적일 수 있는 것이며, 변화무쌍하고 비과학적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인상주의와 사실주의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인상주의의 대표주자들을 거들떠보기로 하자.

마네는 초기 인상주의의 대표자이다. 그의 고전미술에 대한 저항은 당시 젊은 화가들에게 파격적인 인상을 남겼고 결국 나아가 인상주의의 향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그림은 당시 파리의 '뜨거운 감자'였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는 초기 인상주의가 갖고 있던 기존 미술에 대한 저항정신을 가장 농후하게 갖고있었다. 하단에 그려진 그림은 마네의 [올랭피아]다. 이것은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잘 알려진 화가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패러디하면서 살롱전의 고전적 면모를 전면적으로 꼬집고 나섰다. 이에 대한 설명은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기로 한다.

 

  [풀밭에서의 점심]은 당연하게도 살롱전 심사위원들에게 퇴짜를 맞았고, 낙선전에 전시되었을 때 그의 작품은 특히 그 당시 가장 대담했던 젊은 화가들에게 어떤 작품보다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1865년 살롱전에 때맞춰 입선 규정이 완화된 덕분에 마네는 이 그림을 주류파 화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선보일 수 있었다. 그, 결과는 1863년 때보다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역시 빅토린(풀밭에서의 점심에서 벌거벗은 채 정면을 주시하고 있는 여인)을 모델로한 [올랭피아]는 벌거벗은 여인이었다.

                 

  그녀의 신분이 창녀라는 것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거창한 이름[창녀들은 문화적 어원에서 유래한 이런 투의 이름을 애칭으로 즐겨 사용했다. 올랭피아의 로마자 표기는'olympia'이다-옮긴이 김석희씨의 말] 최소한의 옷차림[몸에 걸친 것이라곤 슬리퍼와 벨벳 목끈과 팔찌뿐이다.]과 손의 위치[그녀의 손은 자신의 상품을 가리고 있지만 동시에 그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고 있다.]로 보아 그녀가 창녀인 것은 분명했다.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 하녀가 올랭피아의 단골 고객이 보낸 꽃다발을 안고 있고, 침대 발치에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다. 마네는 다시 한번 생활에서 얻은 소재를 전통적인 거푸집 속에 집어넣어 새롭게 주조해냈다. [올랭피아]는 티치아노의 명화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뻔뻔스럽게 개작한 것으로 우르비노 공작의 애첩을 묘사한 작품을 마네는 피래ㅔㄴ채ㅔ를 여행할 때 두번 모사한 적이 있었다. 
               

 

티치아노의 비너스는 따뜻하고 순종적으로 묘사되어 고전시대의 여신상을 연싱시키지만, 마네는 올랭피아를 여신으로 위장시키는 대신 요란하게 자신을 과시하는 차갑고 도도한 직업여성으로 묘사했다. 충직함의 ㅅ아징인 비너스의 애완견 대신, 마네는 자유의 상징- 냉정함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인 고양이를 그려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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