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발췌
말함의 본질적인 가능성의 하나인 침묵함도 동일한 실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서로 함께 말하는 가운데 침묵하고 있는 사람이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보다 더 본래적으로 [이해하게끔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해를 형성할 수 있다. 어떤 것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한다고해서 이해가 증진된다는 보장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장황하게 말함은 이해된 것을 은폐하고 거짓 명료성 속으로, 다시 말해서 진부함의 몰이해로 이끈다. 그렇지만 침묵함이 벙어리로 있는 것은 아니다. 벙어리는 오히려 거꾸로 [말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벙어리는 그가 침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애당초 그런 것을 증명할 가능성조차 없다. 그리고 천성적으로 말수가 적은 사람도, 벙어리와 마찬가지로, 그가 침묵하고 있고 침묵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주어진 [결정적]순간에 침묵할 줄도 모른다. 오직 진정한 말함에서만 본래적으로 침묵함도 가능한 것이다. 현 존재는 침묵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인가 말할 것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본래적으로 풍부하게 열어 밝힐 처지에 있어야 한다. 그 때에 침묵하고 있음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잡담]을 눌러 버린다. 침묵하고 있음은 말함의 양태로서 현 존재의 이해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분류 파악하며, 이 이해 가능성으로부터 진정한 들을 수 있음과 투명한 서로 함께 있음을 생기게 한다.
침묵하고 있음은 말함의 양태로서 현 존재의 이해 가능성을 근원적으로 분류 파악하며, 이 이해 가능성으로부터 진정한 들을 수 있음과 투명한 서로 함께 있음을 생기게 한다.
가끔 내 수다스러움이 부끄러워진다. 나도 침묵함으로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고, 투명한 공존 관계에 있기를 바라게 된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티스트 이병우 (0) | 2006.08.21 |
---|---|
인상주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0) | 2006.08.17 |
정재욱, [들리나요] 가사 (0) | 2006.08.10 |
구스타프 카유보트 (0) | 2006.08.06 |
장희빈과 인현왕후, 그 숙명의 대립 - 3 (0) | 2006.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