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하게 한 남자의 사랑과, 한 아이에 대한 모성과, 한 여자로서의 행복을 추구했다. 지금 생각하면 여자라면 누구나 꿈꿀만한 그 소소한 일들을 지금보다 삼 백년 전 이 여자는 너무나 힘겹게 거머쥐었고 결국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가 지독한 여자라고, 못된 여자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그런 작은 꿈들을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삼백년 전에 꿨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긴, 그 상황에 누군들 생각조차 했을까. 중인 아버지를 둔 서녀(庶女)가 한 나라의 국모가 될 줄이야. 그 시대 그녀와 같은 위치에 있는 어느 여성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집안이 어려워져 궁인으로 들어가게된 것이다. 그녀와 같은 시기에 궁으로 들어가 일하게 된 궁녀가 어디 한둘이었을까.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남들과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삶을 살아갈 뻔한 자기의 인생에 전환점을 스스로 찾았고, 결국 기회를 잡았다. 각고의 노력 끝에 궁 안에 있는 단 한 사람의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고 행복했다.
하지만 그녀의 연적이었던 인현왕후의 내력은 어떤가.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학문과 출세로 명망이 높은 곳이었고, 그녀가 가례도감 시기에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아버지가 속해있는 당파의 영수, 송시열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그녀가 원하지 않아도 항상 최상의 길을 걸어왔고 그렇게 중전의 자리까지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녀가 실패한 단 한가지는 그녀의 말로까지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은, 사랑이었다.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사랑을 얻지 못한 인현왕후와, 아무 것도 없지만 사랑을 얻은 장희빈이 궁중에서 연적으로 만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지도 모른다.
연적(戀敵). 차라리 궁밖에서 만났다면 이 두여자와 한 남자의 삼각관계는 그냥 그 시대 그 동네의 가십거리가 되고 말았을테지만, 상황은 궁안에서 벌어졌고 그래서 더 그들의 사랑은 투명함을 잃게 되버렸는지도 모른다. 장옥정이라는 한 여자는 그저 한 남자를 사랑했을 뿐인데, 그 한 남자가 왕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은 실로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중인의 서녀라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그녀의 지위는 날로 상승하여 기어이 아들을 낳음으로서 정1품 빈으로까지 상승했고 부와 명예가 함께했으며 그녀의 사가에는 교언영색하는 무리들이 넘쳤다. 그리고, 그 시대엔 내명부든, 외명부든 피해갈 수 없었던 당쟁의 마수가 손사레치고있었다. 인현왕후의 일가- 외척과 손잡은 서인과 다른 당색을 가졌기로, 당시의 마이너로서 재야에서만 활동하고있던 남인들이 그녀의 오라비와 손을 잡았고, 자기 평생에 출세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오라비 장희재로서는 갑작스런 요행에 기고만장해있었다. 권력이란 것은 그렇게 쉽게 얻어졌고, 그랬기에 권력의 맛에 빠르게 길들여졌고 그래서 더 끈질기게 그것을 갈구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마약처럼. 그렇게 찾아온 행운에 장옥정과 그의 일가는 당황하면서도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익숙지 않은 행운은 늘 자만함을 가져오는 법. 수십, 아니 수백년간 정계에서 메이저 자리를 지켜오던 서인들의 입장에선 [애초에 상대도 안될 사람], 영 풋내기 정객의 등장에 코웃음이 나왔을거고, 인현왕후 역시 처음엔 이 변변치 못한 신분의 젊고 활기 넘치는 연적의 행태를 태연함으로 웃어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둘 사이의 묘한 냉기곡선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 둘의 사이에는 숙종이 서 있었다. 숙종이 누구였던가. 치세기간동안 무려 세 번의 환국을 주도하며 당쟁을 왕권강화에 이용한 냉정한 국왕이었다. 남인과 서인,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대립 마저도 그에게는 정국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잠시 중간에 끼워넣기 식으로 당시 메이저였던 서인의 내력을 잠깐 간추리자면,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기점으로 정계에 본격적인 메이저로 떠올랐다. 난 개인적으로 '인조반정'을 반정[返正:돌이켜바로잡는다]보다는 '인조쿠데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뭐 이런 객담은 집어치우고 여튼 광해군은 패륜이라는 덜미를 제대로 잡히는 바람에 그동안 남긴 대내외적으로 좋은 치적을 남겼음에도 일가가 위리안치되는 치욕을 겪었다. 서인들은 패륜아를 왕위에서 쫓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세우자는 명분에서 인조를 추대한 것이지만 내막은 달랐다. 동인- 그중에서도 북인이 메이저를 이루었던 정국을 뒤집고 새로이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 없을리 만무했다. 반정 이후, 신하들의 힘으로 왕을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 정설화되자, 왕권은 서인의 신권에 서서히 고개를 숙였고, 기어이 인조는 역사상 가장 용렬한 임금이 되버렸을 뿐만아니라[애초에 반정의 모토로 세운 패륜아 추방을 지키긴 했지만 그건 턱없이 융통성 없는 것이었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중립 외교 정책을 아버지의 나라 명국을 배신한 것이라 하여 강력 규탄하고 친명배금정책을 꿋꿋이 주장하다가 병자호란이라는 철퇴를 경험한 바 있다.] 서인들의 등살에서 왕권을 지켜내는 데에서 조차도 실패를 맛본다. 그의 아들 효종은 아버지의 친명배금정책을 이어받아 보다 실질적인 배금정책을 강구하지만, 함께 배금을 외치던 서인들은 어느새 그들의 배금, 반청주장은 속 빈 강정 꼴이 나고 만다. 결국은 열심히 키워낸 북벌을 위한 특수부대를 청의 요청에 따라 나선 정벌 원정 지원군으로 내주기까지 한다. 서인 정론은 부패한거다. 애초에 반정을 준비할때는 어땠을지 몰라도 그들에겐 왕권보다는 신권이었고 국가 안정보다는 서인 세력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현종 때와 숙종 초까지 이어간 예송 논쟁에선 비록 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냐라는 보기엔 다소 사소한 논점일 수 있으나, 그때마다 매번 적은 기간동안 상복을 입는 것을 주장하면서- 이 이유까지 알려면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의 죽음까지 집고 넘어가야하는데ㅠ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다. 예송논쟁은 왕비의 아들이지만,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그를 왕실의 서자로 봐야하는지, 왕비의 아들이면서 왕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첫째 아들과 같은 적자로 봐야하는지에 대한 궁극적 문제로 까지 넘어간다. 결국 왕권을 오롯하게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서인은 그때마다 매번 효종을 서자라고 물고 늘어지면서 왕권에 제동을 건 바 있다. 신하들의 중론에 따른 정치, 얼핏 보면 민주정치같기도 하지만 오직 그들만의- 서인만의 정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조선 정치사에 결정적 걸림돌이 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서인들의 권력이 왕권을 침해하려는 것을 숙종은 원치 않았고, 결국 장희빈을 중전으로 승격시킴으로서 희빈의 배후에 있던 남인들을 정국 중역으로 배치, 반면 중전 자리에 있던 인현왕후를 폐서인하고 서인을 대거 축출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이 과정 중에 장희빈이 인현왕후에게 무고한 누명을 씌워 폐서인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둘은 완벽하게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을 맞이함으로서 서로가 한 남자를 두고 있는 연적 뿐만 아니라 필생의 정적임을 각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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