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략 변경을 간파한 이순신은 곧 이억기를 불러 3차 연합함대 구성과 함께 출전을 계획하였다.
6월 23일 일본의 제 1군인 야스하루 함대 70여척이 웅포를 발진해 견내량을 통과했다.
7월 7일 이순신은 적선 70여척이 견내량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7월 8일 이른 아침 6척의 특공선단을 견내량에 투입했다. 이 때 왜군 정탐선 2척을 발견해 추적을 시작했다. 적 정탐선은 그들의 본진이 있는 두호리 포구로 도망을 갔고, 두호리 안에서 대기 중이던 야스하루는 즉각 요격 함대를 발진시켰다.
견내량은 통영과 거제도 사이의 남북 길이 약 3Km, 너비 약 500m의 수로이다. 이순신의 특공함대와 왜의 요격함대는 즉각 조우하였다. 곧이어
그러나 이것은 이순신의 치밀한 함정이었다.
이 전투에 대한 일본측의 ‘협판기(脇坂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일본측)는 조선의 배를 약 30리 정도 추격하였다. 조선 배들은 좁은 수로를 빠져나가 넓은 바다에 이르자,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우군(왜함대)의 배를 포위하고 들락날락거리면서 공격하였고, 그 때마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할 수 없이 좁은 수로로 다시 후퇴하려고 하였으나, 적선(이순신 함대)들이 퇴로를 막고 커다란 불화살을 마구 쏘아 아군의 배는 화염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 한산도 해전은 이순신의 학익진과 정(丁)자 타법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대해전이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해전에서
7월 9일 역풍이 불어 외즐포에서 하루를 쉬고, 7월 10일 새벽 이순신은 왜군의 본영인 안골포를 소탕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오전 7시경 약 21Km 떨어진 안골포에 도착해 입구를 철저히 봉쇄했다. 안골포에는 일본 해군 총사령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의 연합 함대가 정박해 있었다. 일본 최대의 거함인 니혼마루를 비롯하여 오타루마루, 나미키리마루, 야마시라즈마루 등 대형의 전함들이 즐비한 이 연합함대는 전날의 야스하루 함대의 괴멸 소식에 미리부터 겁을 먹고 안골포에 숨어 있는 중이었다.
안골포는 지형이 얕고 좁으며, 썰물 때는 바닥이 노출되어 크기가 큰 판옥선은 마음대로 항내로 진입할 수가 없었다. 이순신은 갖은 방법으로 유인을 하려 했으나, 왜군은 야스하루 함대의 전멸을 경험한 터라 좀처럼 싸움에 응하려 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이순신은 밀물 때를 기다려 아주 좁은 공간에서 전투를 벌이고자 하였다. 이순신은 제장들에게 명하여 전함들을 줄지어 투입하되 가장 가까이 접근한 전함이 천.지.현자 총통 및 각종 대포들을 발사하고, 포탄이 떨어지면 즉시 빠져나와 다음 배가 공격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자연히 전투는 길어지게 되었고, 또 적의 기함 니혼마루를 지키려는 다른 왜함들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좀처럼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었다. 이리하여 오전 7시부터 시작된 싸움은 온종일 계속되어 저녁 8시경이 되어서야 대부분의 왜함들을 격침하거나 불태울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적의 기함 니혼마루도 항해 불가능한 상태라고 판단하고 일단 전투를 끝낸 후 항구의 입구를 봉쇄한 채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잔적을 소탕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온종일 계속된 전투로 피곤에 지친 몸을 견디지 못하고 파수병들이 깜빡 잠든 틈을 타고 니혼마루가 몰래 도망치는데 성공하였다.
11일 새벽 이순신의 함대는 다시 왜적 소탕전에 나서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잔적들은 모두 도망쳐 버린 뒤였다. 이순신이 즉시 수색조를 편성하여 양산강, 김해강 일대를 샅샅이 뒤지게 하였으나 이미 왜적들은 모두 부산 쪽으로 도망간 후였다. 이로서 남해의 해운로를 확보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였고, 북쪽으로 진출했던 왜병들은 군수품 부족과 다가오는 겨울 추위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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