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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옥포해전

timid 2005. 8. 2. 19:07

 

옥포해전

 

이순신은 출전 준비를 마치고 이억기의 함대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렸으나 늦어지자 5월 4일 단독으로 출전을 명한다. 이 첫 출전에는 전라좌수영의 모든 함선이 망라되었는데 전투함인 판옥선이 23척, 신무기인 거북선이 1척, 연락선인 협선이 15척, 위장용 전선인 포작선이 46척 등 총 85척이었다. 그러나 실전에 사용될 수 있는 판옥선과 거북선은 24척에 불과해 500여척의 대선단인 왜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인 모습이었다.

첫 출전에서 이순신의 함대는 이미 달아나 버린 각지의 군관들을 불러 모았으나 후방의 군관들 중 달아난 자가 많아 배후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며 전진해야 했다. 이에 이순신은 척후선을 좌우 2개의 수색조로 편성해 운영하면서 전진해 갔다. 이순신은 5월 5일 당포 앞바다에 도착해 원균과 합류하여 왜적을 요격하려 하였으나, 원균은 나타나지 않다가 다음날 오전 8시가 되어서야 단 1척의 전함만을 끌고 나타났다.

기대했던 원균의 함대가 완전히 전멸했음을 안 이순신은 경악했으나 실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행히 원균의 부하 중 원균의 눈을 피해 숨겨 둔 군함을 타고 나타난 남해 현령 기효근과 영등포 만호 우치적, 옥포 만호 이운룡 등이 합류하여 경상우수영의 전함은 4척이 되었다. 따라서 함대는 전함 28척과 협선 27척으로 늘어났다.

비록 이름뿐인 경상우수군 함대와의 합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연합함대를 구성하게된 것이다. 수색을 계속한 끝에 5월 7일 거제도 옥포 앞바다에서 우척후선 선장 김완, 좌척후선 선장 김인영이 옥포만에 정박중인 왜 선단을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이때까지 입수한 정보로 왜의 함선은 처음의 500척보다 훨씬 많은 700여척으로 파악되고 있었으므로 700대 28의 불가능한 해전을 각오한 것이었다.

5월 7일 정오경 옥포 앞바다를 돌아선 척후선으로부터 3발의 신기전(神機箭)이 발사되었다. 적을 발견했다는 신호이면서 적선이 30척으로 보인다는 뜻이기도 했다. 돌연 병사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이때 이순신은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침착하고 신중하기를 산과 같이 하라’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옥포만에 정박하고 있던 왜함대는 도도 다카토리와 호리우치 우치요시 함대의 연합함대로 남해의 해로를 여는 정예의 최선봉 함대였다. 이들은 부산진과 김해를 함락시키고 5월 6일 10시경 율포를 유린한 후 5월 7일 아침에 이곳 옥포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조선 수군을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승리의 자축연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조선 수군이 접근하는 것을 보자 잠시 당황했으나 그 수효가 30척 안팎에 불과하자 호기있게 자신들의 함대 50척을 출동시켰다. 당시의 해전 방식은 전 세계 어느 곳이나 접현전(接舷戰)이었다. 즉 멀리서 대형 화포를 발사하여 손실을 입힌 다음, 서서히 접근하면서 봉화시(烽火矢:불화살)로 교전을 벌이다, 배를 밀착시켜 백병전으로 승부를 가리는 방식인 것이다.

백병전을 당연시 한 일본군은 함대를 어려진(魚儷陣:몰려 다니는 물고기 모양)으로 펴고 조선 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진형은 일단 충돌하면 배를 옮겨다니며 백병전을 벌이기 좋은 형태였다. 그런데 이순신의 함대는 포구에 들어서면서 양쪽으로 갈라져 일본 함대를 에워싸듯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소위 이순신의 독창적인 전법인 학익진(鶴翼陣)의 형태였다. 학익진은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형태인데, 어려진의 적에게 중앙을 돌파당하면 집중된 적의 병력에 비해 분산된 병력 배치가 되어 백병전으로는 승산이 없는 형태였다.

일본 함대의 다카토라에게는 이것이 조선 해군이 전혀 경험이 없거나 이미 겁을 먹고 달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던 다카토라의 함대가 이순신 함대의 기함에 바짝 접근했을 때 갑자기 조선 함대 속에서 이상하게 생긴 배 한 척이 빠르게 튀어나와 입 속에서 대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다카토라의 최선봉 전함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고 말았다. 바로 거북선의 돌격 전술이었다. 더구나 일본 함대의 입장에서는 거북선의 모양은 접현전을 시도할 수 없는 형태였다.

조선 해군과의 첫 전투에서 패할 수 없었던 다카토라는 부하들을 격려하며 전력을 다해 전투를 지휘하여 조선의 전함에 기어오르도록 하였으나, 그때마다 200여개의 산탄이 발사되거나 발화탄을 맞아 병사들이 대량으로 쓰러지거나 배에 불이 붙어 도저히 싸울 수가 없었다. 차츰 일본 해군의 전투력은 상실되어 갔고 결국 다카토라의 함대는 패하고 말았다.

지휘관인 다카토라는 기함이 격침되면서 물에 뛰어들어 인근의 섬으로 피했다가 수일만에 뗏목을 타고 간신히 탈출하였고, 50척의 일본 함대는 대전함 16척, 중군함 8척, 소선 2척 등 총 26척이 격침되고 일본 수군 4080명이 도살되었다. 이때 이순신의 함대는 전선 피해 및 전사자가 전무하고 부상자가 단 2명 있을 뿐이었다. 이순신 함대의 첫 번째 전투인 옥포 해전은 옥포 주민들의 관전하에 진행되어 민심을 크게 진작시켜 주어 또 다른 의미가 있는 전투였다.

이때 사용된 학익진은 이순신의 전술인 정(丁)자 타법을 효율적으로 구사하기 위한 진형으로 전함의 함포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방법이다. 즉 달려드는 적선에 아군의 함선을 가로막듯 돌려 정(丁)자 형태를 만들고 적이 전방의 포를 1-2문 사용할 때 우리는 측면의 포 10문을 동시해 발사해 10대 1의 우위를 점하는 방법인 것이다. 이는 당연히 정밀한 함포 발사 기술과 체계적인 함포의 연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당시의 해전 전술이 함포를 이용해 대충 발사하면서, 경미한 타격을 입히고는 곧바로 접현을 통해 백병전을 벌이던 것에 비해, 접현을 아예 허용하지 않고 함포만으로 요격하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전술인 것이다.

 이 정(丁)자 타법은 300년이 지난 1905년 5월 일본의 도쿄헤이 하치로 제독에 의해 다시 한번 계승되었다. 하치로 제독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상대하여 일본의 국운을 걸고 일전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일본의 영웅으로 지금까지 추앙 받는 사람이다.

하치로는 임진왜란의 일방적인 패배를 깊이 연구하여 마침내 이순신의 학익진과 정(丁)자 타법의 비밀을 알아내었고, 이를 러시아의 발틱 함대와의 전투에 응용함으로써 승리한 것이다. 이를 일본에서는 T자 전법이라 부른다. 하치로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이순신을 군신(軍神)으로 섬겼다고 한다.
 

▶ 학익진과 정자 타법
   
학익진(鶴翼陣)과 정(丁)자 타법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학익진은 기본적으로 그림에서 보듯이 적은 아군에게 종대가 되도록 하고, 아군은 횡대가 되도록 배치하는 형태에 적을 감싸 안듯 양 날개가 휘어진 배치가 된다. 이런 배치는 아군의 포격 유효 사거리 안에 적을 최대한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4열 종대의 적선 100척과 이순신 장군의 함대 10척이 대적을 했다면, 병력의 차이는 100:10이지만 접전하는 시점에서는 4:10이 되어 그 비율이 역전된다. 이 같은 원리를 실전에 적용한 것이 학익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실전에서는 이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하여간 늘어선 적을 향해 아군으로 깔때기 모양을 만들어 에워싸는 것은 전투병력의 투입 비율에서 상당한 차이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여기에 이순신은 본문중의 설명처럼 함포전을 통한 일정한 거리의 유지로 그 효과를 극대화 하고 있다. 다시 이순신은 조선 수군이 보유한 판옥선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더욱 큰 효과를 창출해 낸다. 즉 판옥선의 특징을 이용한 것인데, 이 배는 배의 바닥이 평평해 빠르게 달릴 수는 없으나, 홀수선(배가 물속에 잠기는 선)이 낮아 수심이 낮은 서해에서 유리하며, 특히 양측의 노를 반대로 젓는 것으로 제자리에서의 회전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제자리에의 회전은 판옥선을 쉽게 돌려 측면에 설치된 화포를 적에게 발포함으로써, 선수와 선미에 설치된 2문 내외의 화포에 비해 5배인 10여문의 화포를 빠르고, 또 일시에 발포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학익진의 형태에서 종대로 내려오는 적은, 위의 예에서 4척이 각각 2문씩 총 8문의 화포를 발포할 수 있지만, 이순신의 판옥선은 학익진으로 4:10, 다시 화포에서 8:100의 비율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즉 화포전을 계속하는 한 100:10의 전세는 8:100으로 역전된 것이다.

다시 판옥선의 제자리 회전 기능을 적극 활용한다면, 좌현의 포를 발포할 때, 우현은 장전을 하고, 발포가 끝나면 배를 회전시킨다. 이 시간에 발포를 마친 좌현은 장전을 하고, 장전이 끝난 우현이 적에게 향하면 다시 발포한다. 다시 배는 회전하고 회전이 끝나면 장전이 마쳐진 좌현이 다시 발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서 앞서의 8:100은 다시 8:200의 비율로 역전이 된다. 바로 이것이 정(丁)자 타법으로 적선에 화포가 많은 측면을 향하게 하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위의 학익진도는 바로 학익진과 정자타법이 동시에 적용되는 형태인 것이다.

이쯤의 설명이 충분한지는 모르겠으나, 이 전술을 고안하고 실천한 이순신이 왜 대영웅이고, 대제독인지는 분명한 것이다. 설명을 통해서는 쉽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이순신이 이와 같은 전술을 사용하고 있을 때, 이에 당하기만 했던 10여만 이상의 왜군들은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패전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또 본문중의 내용처럼 이 전술의 원리를 일본이 알아낸 것은 300년이나 지난 후였으며, 이순신 이후 대략 이때쯤까지 전세계의 해전은 계속 접현전으로 일관해 왔던 것이다. 즉 이순신은 이순신 이후 가장 빨리 이 전술을 고안한 사람보다 300년이나 빨랐던 것이다.

이순신의 학인진도를 보면 얼마나 정교한 진형인지 감탄하게 된다. 그림의 학익진 형태(즉 포위진형)는 이 진형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약점을 완벽하게 커버하는 것이다. 그 약점의 첫번째이런 진형에서 함포의 사거리가 충분치 못하거나 정확도가 떨어질 경우, 함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심부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이런 진형을 상대하는 측이 충분한 이동속도(여기서는 배의 속도)를 가지고 있고 원추형의 진을 구성해 중앙을 빠르게 돌파하는 종심돌파를 통해 진의 중앙을 깨고 좌측이나 또는 우측으로 돌아 들어가면 순식간에 상호간의 위치, 즉 횡대와 종대의 위치가 반대가 되고, 병력은 반으로 나뉘어져 각개격파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림에서의 학익진도는 학익진 안에 작은 학익진을 배치한 형태로, 진의 중심부에 발생할 수 있는 사각지대를 없애면서 병력의 집중을 통한 종심돌파마저 확실하게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물살과 바람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런 형태의 진을 수십척의 함선이 유지하기란 매우 어렵다. 모든 함선이 제자리를 고수하는 것도 어려운데, 레이더 등이 없어 정확한 위치를 알기도 어렵고, 육안에 의해 수평적으로 밖에 볼 수 없는 바다에서 진의 형태를 바로 잡으며 위치를 관리하는 지휘부는 더욱더 어렵게 마련이다. 실전에서 이런 형태의 진형을 그것도 평지에서의 육군이 아닌 바다에서의 수군이 유지해 완벽하게 운영했다는 것은 이순신이 단순히 전략과 전술의 귀재일 뿐 아니라 경영의 귀재이기도 했음을 짐작케 한다.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순신 함대는 정자 타법의 자신감과 함께 사기까지 충천하여 연이어 합포, 적진포 등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어 다음과 같은 전과를 기록하게 된다.

이순신 함대 1차 출전 전과
참전 전함 : 조선 - 27척
일본 - 옥포 35척, 합포 5척, 적진포 13척 등 총 53척
격침 : 조선 - 없음
일본 - 총 42척
전사자 : 조선 - 없음
일본 - 6920여 명
부상자 : 조선 - 2명
일본 - ?

1차 출전에서 세계 해전 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운 이순신의 함대는 모든 병사들이 자신감을 얻는 또 다른 성과를 거두며 개선하여 전라좌수영으로 돌아왔다. 이순신이 돌아오자 전라좌수영에는 놀라운 소식이 와 있었다. 선조가 백성들을 속여 안심시키고는 혼자 야밤에 도주했고 이에 분개한 백성들이 경복궁과 창경궁 등을 불태웠으며, 길가의 백성들도 도망가는 선조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했다는 것이다.

첨부이미지

                                                                          - 출처 네이버 블로그 하늘과 바람을 벗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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