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해전
5월 27일 원균은 왜 함대 10여 척이 사천포와 곤영까지 쳐들어와서 그의 잔존 함대 3척을 이끌고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인 노량까지 도망쳐 왔다는 공문을 이순신에게 보냈다. 사천포는 전라좌수영에서 불과 5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억기 전라우수사에게 지원하라 요청하고, 자신은 먼저 23척의 전선만을 거느리고 출전하였다. 이 때 유진장에게 윤사공을 임명하고, 조방장 정걸에게 후방의 지휘를 맡겼으며, 그 자신은 우후(虞候:부사령관) 이몽구를 데리고 출전하였다.
5월 29일 제 2차 출전은 여수에서 출발하여 사천으로 향했다. 하동을 지나자 숨어있던 원균이 함선 3척을 끌고 합류하였고 함대는 노량을 거쳐 사천으로 계속 항진하였다. 사천에 당도하니 사천 포구에는 12척의 대형함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밀물이 될 때까지 기다려 적선을 완전히 격멸시켜 버리고 왜적 2600명을 도살하였다.
사천의 함대를 격멸하고 6월 2일 오전 10시경, 찾고 있던 왜적의 대장선이 당포에 있음을 발견하고 포구 입구를 막고 전투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이후의 전투는 기함을 잃고 허둥대는 왜함대를 이순신의 함대가 학익진과 정자 타법을 이용해 철저하게 격파한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함대는 당항포 해전 후 율포에서도 3척의 적함을 격침하고 3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이 제 2차 출전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적함 3척 나포
적병 10120명 도살(적장 2명 포함)
아군 피해 : 전함 손실 없음. 전사 11명, 부상 47명(이순신도 어깨에 가벼운 총상을 입었다.)
선조가 떠나버린 한양에는 이미 왜군의 조선원정 총사령부가 설치되어 있었다.
왜군의 조선침략 전술은 육군이 신속하게 전진하고 보급은 대량 수송이 가능한 선박을 이용해 해상과 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속한 이동을 목표로 한 육군은 그리 많은 보급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에 이데이에는 한양에 있던 몇몇의 해군 대장들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장군의 육군으로 하여금 전라도로 진격하게 하였다. 또 일본 함대를 새로 편성해 3개 함대로 나누어 제 1군은 아키자카 야스하루가 맡아 70척의 전함으로 구성하고, 연합함대 총사령관으로 구키 요시타카를 임명하고 제 2군을 맡게 하며 기함으로 니혼마루(日本丸)를 배정했다. 니혼마루는 전장 70m로 노가 120자루나 되는 일본 최대의 기함으로 히데요시가 조선으로 올 때 타기로 했던 전함이다. 또 3군은 가토 요시아키가 맡는 것으로 하였다. 연합 함대는 115척의 전함으로 구성되어 해로 확보를 위한 전략 변경을 하였다.
이로서 야스하루, 요시타카, 요시아키 등은 육전대 1만여 명을 이끌고 6월 7일 한양을 출발해 6월 14일 부산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115척의 연합함대를 재구성하고 부산 서쪽 30Km 지점의 웅포(지금의 진해)에 해군 본영을 설치했다. 제 2군의 요시타카가 니혼마루를 기함으로 삼아 42척의 전함으로 웅포에 머물렀고 제 1군의 야스하루가 초대형 전함 7척을 포함하여 70척으로 선봉에 섰다. 이와 동시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3만의 병력으로 전주성을 격파하고 전라도 수군 본영을 공격하기 위해 전진해 왔다.
- 출처 네이버 블로그 하늘과 바람을 벗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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