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시간 : 2006.12.12 23:46 / 수정시간 : 2006.12.13 0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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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공드리(Michel Gondry·42) 감독은 전작 ‘이터널 션사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언젠가 배우게 되겠지”라고 노래한다. 자신의 기억을 지우려다 추억 속에서 헤매게 된 주인공의 모습은 기억과 망각 속에서 사랑의 본질을 습득하지 못한 우화처럼 보인다. 데뷔작 ‘휴먼네이처’는 더욱 노골적이었다. 숲으로 하이킹을 떠난 라일라와 나단이 야생의 삶을 사는 퍼프를 만나면서 문명과 야만의 질서는 뒤집혀 버린다. 기억보다 망각을 생각하고, 문명보다 야만을 떠올렸던 미셸 공드리 감독이 새롭게 도전한 분야는 ‘꿈’이다. 전작과는 달리 뛰어난 시나리오 작가이자 동업자인 필립 카우프먼이 빠지기는 했지만 현실보다 꿈을 앞세우는 공드리 감독의 세계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면의 과학’(21일 개봉)의 주인공 스테판(가엘 가르시알 베르날)은 여섯 살 이후부터 꿈과 현실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파리에 온 스테판은 졸지에 달력 인쇄소에 취직을 하게 되고, 옆집에 이사를 온 스테파니(샬롯 갱스부르)를 만나면서 사랑에 빠진다. 스페인어, 불어, 영어를 혼란스럽게 구사하는 스테판은 직장 동료와 스테파니를 현실보다는 자신이 만든 꿈의 세계에서 훨씬 자주 만난다. 불어 발음이 나쁘다며 스테파니에겐 영어로 말을 거는 소심한 남자 스테판은 꿈에서 만은 정력적이고, 과감하다. 오래전부터 꿈은 인류에게 또 다른 삶의 가능성(혹은 잠재성)이었다.
▲‘휴먼 네이처’(2001) ‘이터널 선샤인’(2004)으로 이미 많은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미셸 공드리의 신작‘수면의 과학’. 이번 영화에서도 창조적인 상상력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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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꿈’ 항목에 에 따르면 ‘세노이’라는 원시부족은 꿈을 삶의 중심에 놓았다고 한다. “꿈에서 남을 때린 사람은 맞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선물을 주어야 했다.” 베르베르는 1970년대에 숲이 개간되면서 세노이 부족이 사라졌지만 그들의 지혜를 잘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연애를 할 기회가 생기거든 놓치지 말고 마음껏 활용하라. 꿈에는 성병도 없고 외설도 없으니 말이다.”
스테판만큼 꿈을 잘 활용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의 몽상들은 베스트셀러가 된 달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파멸학’이라 불리는 달력에는 매달 기억할만한 재앙 수준의 사건들이 담겨 있다. 예를 들자면, 9·11 테러와 같은 사건들이 한 장을 채운다. 스테판을 위해서는 좀 더 아기자기한 발명품을 선보인다. 버튼을 누르면 1초 전으로 돌아가 방금 한 행동을 되풀이하도록 연출한 ‘타임머신’은 1초라는 시간의 진정한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기막힌 발명품들은 인류의 역사에 새로운 문명을 가져다주지는 못하겠지만 엉뚱함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이다. 스테판이 꾸는 꿈은 셀로판지로 된 물과 솜으로 된 구름이 떠다니는 잡동사니들이 아름답게 떠다니는 창조력의 과학이다.
스테판이 제시하는 꿈의 세계는 장난감 말이 초원을 달리는 모험을 실현시키는 순간이자 인류에게 오래된 휴식인 ‘잠’을 선사하는 순간이 되어 준다. 모험과 휴식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지는 카오스의 세계는 인류가 현실에서는 꿈꿀 수 없는 신비로움이다. 종종 영화 관람 행위를 꿈이나 최면술에 비유하고는 하는데, ‘수면의 과학’은 과거 악몽을 스크린 위에 쏘아 올렸던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는 달리 훨씬 달콤하면서도 개인의 열망을 담아낸 장면들을 끄집어낸다.
그것은 잠에서 깨어 난 후 망각하고 있었던 어젯밤에 펼쳐진 당신의 꿈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