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이야기에 관해서
- J.R.R. Tolkien
몽상의 나라(faerieland)는 위험한 곳이다. 주의력이 모자라는 자에게는 함정이
입을 벌리고 있고, 지나치게 대담한 자를 위해서는 지하감옥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몽상의 나라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본 적은 없다. 단지 글 읽기를 알고 난
뒤 몽상의 이야기(Fairy Stories : 작가는 동화라는 의미보다 환상적인 이야기
라는 뜻으로 이 말을 쓰고 있음 - 역주)에 심취했으며 그런 이야기에 대해 늘
생각해 왔을 따름이다. 나는 경이에 가득 찬 몽상의 땅의 고독한 방랑자였을
뿐이다.
몽상의 이야기의 범위는 넓고 깊고 높다. 거기에는 온갖 짐승과 새가 있고 경
계선이 없는 바다, 헤아리지 못한 별빛이 있고, 요술과 같은 아름다움이 있고,
떠나지 않는 위험이 있고, 비수와 같이 날카로운 즐거움과 슬픔이 있다. 몽상
의 나라를 방황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에게 행운이 따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풍요함과 낯선 산천은 그곳의 얘기를 퍼뜨리는 사람들의 혓바닥을 묶어 버
릴지도 모른다.
몽상의 이야기란 무엇인가? 나는 정의를 내리려 하지 않겠으며, 직접적인 설명
도 하지 않겠다.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의 그물로써는 잡을 수 없
는 그 무엇이고, 또 설명하기 아주 힘든 것이다. 단지 한마디로 그것은 몽상의
나라를 다룬 이야기라고만 막연히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몽상의 이야기의 독자는 일반적으로 어린이들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어른들도
읽을 수 있는 얘기라는 뜻에서 '이 책은 6세에서 60세까지의 모든 어린이에게
읽힐 수 있는 책'이라는 등의 표현을 쓰는 서평자(書評者)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새로 나온 장난감 자동차 모델에다 '이 차는 7세에서 70세까지의
모든 어린이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라는 따위의 소개글 같은 것이 붙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그러면, 몽상의 이야기와 어린이 사이에는 어떤 본질적
인 관계가 있을까? 몽상의 이야기가 해롭지 않다는 것을 알만큼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어린이의 마음과 몽상의 이야기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관계가 있
다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마치 우유와 어린이의 육체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거기에는 어린이를, 인간과 무관한 어떤
별개의 동물로 생각할 뿐 가족의 일원, 인간가족의 한 멤버로서 생각지 않는 경
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계층으로서의 어린이는, 어른보다 특별히 더 몽상
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더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일부러
자극을 주지 않는 한, 아주 어린 나이에는 그런 얘기를 읽을 수 없지만 한 번
맛이 들면 나이가 들수록 점차 뗄 수 없는 취미가 되고만다고는 말할 수는 있
다.
그런데 "어린이들의 취미는 수천년 전 벌거벗은 인류의 취미와 조금도 달라지
지 않았다. 그들은 역사, 시, 지리, 산수보다도 몽상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고 안이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의 벌거벗은 조상에 대
해 제대로 알고 있는가? 몽상의 이야기는 인류의 조상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듣던 그대로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감은 곧 악에 물드는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대개는 그렇게 되고 말기는 하지만. 어린이들은 자라
기 마련이다. 피터 팬이 되어서는 안된다. 깨끗한 마음과 경이의 정신을 잃지
않아야 한다. 어수룩하고 둔감하고 이기적인 아이에게도 몽상의 이야기의 위험,
슬픔, 죽음의 경험은 인간의 존엄성과 어쩌면 삶의 지혜로움도 줄 것이다. 하지
만 아이들이 읽는 책도 아이들이 입은 옷처럼 성장할 수 있는 여유를 남겨놓아
야 한다. 만일 어른들이 문학의 한 자연스런 분야로서 몽상의 이야기를 읽는다
면, 그 가치와 역할은 어떤 것이 될까? 이건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몽상의 이
야기도 그게 훌륭하게 쓰여진 것이라면 하나의 문학이 갖고 있는 가치를 공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문학보다도 성인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특질들
을 보다 많이 경험케 해 줄 것이다. 환상(fantasy), 회복(recovery), 도피
(escape), 위안(consolation)의 요소가 그것이다. 몽상의 이야기가 가진 이러한
특성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게 아니겠는가. 요즘 어른들은 아이
들이나 어른들 자신에게도 악하다고 생각되고, 여러 가지 긴장 속에 꼼짝할
수 없이 빠져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위안과 도피, 그리고 회복이 필요하다.
인간의 마음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정신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 내는 능
력을 가지고 있다. 즉 상상력이 있다. 인간의 예술가운데서 환상은 문학이라는
예술로서 가장 좋은 표현을 얻고 있다. 예를 들면, 회화미술의 환상적인 이미
지는 그리기가 너무 쉽다. 붓은 마음을 앞지르되 나아가서는 그것을 뒤엎어 버
린다. 연극은 성격상 환상의 표현수단으로서는 잘 맞지 않는다. 단순한 환상도
무대에 올려 성공하는 예가 드물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환상적인 형상을
위조하듯 그려낼 수는 없다. "극화(劇化)되기 쉬운 몽상의 이야기일수록 그 이
야기는 그만치 잘못된 작품일 가능성"이 많다.
환상이란 인간의 자연스러운 활동이다. 그것은 일견 생각되듯 이성(理性)을 파
괴하지도, 경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과학적 진리에 대한 욕구와 인식을 없애
거나 둔화시키지도 않는다. 반대로 날카롭고 명확한 이성일수록 그것은 보다 훌
륭한 팬터지(환상)를 만든다. 만일에 인간이 진실을 알고 싶지도 않고, 인식할
수도 없는 상태라면 환상은 사멸해 버릴 것이다. 물론 도가 넘치는 환상도 있
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로 가짜 신(神)을 만들고, 가짜의 깃발, 관념, 위조화폐
를 만들지 않았는가? 더구나 인간의 과학, 사회 및 경제이론은 인간의 희생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팬터지는 고금을 통해 인간의 신성한 권리였다. 우리가 그
림을 그릴 때, 모든 선은 굽은 선 아니면 직선일 수밖에 없다고 해서, 또 색깔
이라고는 '삼원색'밖에 없다고 해서, 절망적인 기분을 느낄 필요는 없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조상의 예술적 유산은 권태가 아니면 독창성을 보이고 싶은 엉
뚱한 열망을 가져올 위험성이 있다. 누가 보아도 훌륭한 소묘, 섬세한 무늬, 아
름다운 색깔이 상대적으로 싫증을 낳을 수도 있고, 옛 예술을 본질적으로 이해
하지 않고 그저 적당히 손질하거나 과장하는데 만족해 버릴 우려도 있다. 그러
한 권태로부터 참되게 도피하는 길은 어색하고 조악하며 추한 것을 그리거나
삼원색을 부정하여 검은 색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상태, 그런
싫증과 권태에 빠지기 전에 회복이 필요하다. 새로운 눈으로 녹색을 보아야 하
며, 언제나 그 색이 그 색인 청색, 황색, 적색에 다시 한번 경이의 느낌을 갖는
신선한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범용의 리얼리티를 떠나 반인반수의 괴물,
용을 만나 보아야 한다. 그러면 어쩌다 옛 목동처럼 양이나, 개, 말 그리고 늑
대마저 새로이 보게 될지도 모른다. 몽상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러한 감정의
회복을 갖다준다. 회복(건강을 찾는 것을 포함해서)은 밝게 볼 수 있는 시야(視
野)를 되찾는 것이다. 물체를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게 아니다. 평범하고 눈에 익
은 것의 단조로운 불투명성을 벗어날 수 있도록, 깨끗이 우리들의 유리창을 닦
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친근한 사람들일수록 환상적인 속임수를 쓰기
가 어려우며 신선한 관심을 갖고 대하기가 어렵다. 창조적인 팬터지는 우리의
창고 문을 열고 새장의 새처럼 가둬놓았던 일상(日常)의 모든 것을 날아가 버
리게 할 것이다. 세균은 모두 변하여 꽃이나 불꽃으로 화할 것이고, 우리가 가
지고 있던 모든 것이 각각 위험스럽고 강력한 힘을 가지며 제멋대로 날뛰고, 자
유롭고 거칠어진다는 경고를 우리에게 줄 것이다. 진부하며 (나쁜 의미에서) 친
근한 것을 우리들은 합법인 것으로 알고 혹은 정신적으로 다른 목적에 도용(盜
用)해왔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억의 창고
에 묶어두지만 그 순간 그런 것은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며 환상은 그것을 모두
진부성으로부터 해방시켜 버린다. 몽상의 이야기는 단순하고, 근본적인 것을 다
룬다. 자연을 자유롭게 다루는 사람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지 노예일 수가
없다. 내가 말의 힘과 돌, 숲, 쇠, 나무와 풀, 집과 불, 빵과 술 같은 물체의 경
이로움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몽상의 이야기에서였다. 물론 몽상의 이야기만이
인간의 유일한 회복의 수단은 아니다.
도피와 위안은 어떠한가. 오늘날 몽상의 이야기는 가장 명확하고도 과격한 도
피주의 문학이다. 도피가 몽상의 이야기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라고 나는 주
장해왔다. 따라서 나는 '도피'라는 말이 쓰일 때 은연중에 냉소, 연민의 억양이
뒤따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감옥에 갇혔음을 안 사람이 밖으로 나가 집으
로 돌아가려는데 비웃음을 받아야만 할까? 돌아갈 수 없을 때, 그 죄수가 다른
죄수나 또는 감옥의 벽 얘기 대신에 딴 얘기를 하면 안되는 것일까? 죄수가 바
깥 세상을 볼 수 없다고 해서, 세상이 비현실적이고 동떨어진 피안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들은 도피란 말을 잘못 쓴다. 죄수의 도피와 탈주자의 도주와 혼
동하는 것이다. 나로서는 블레츨리역(驛)의 지붕이 '구름'보다 더 실제적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열차의 기관사가 환상을 읽으며 자랐다면 좀 더 일을 잘했으
리라 믿어서는 안 될 이유는 없다.
"현대 유럽인들의 생활이 덜 돼먹었으며 추악하다는 것은 생물학적 열등성의
표시이며, 환경에 대한 잘못되고 불충분한 반응의 증거이다." 터무니없는 게일
(영국 북부지방 사람 -역주) 사람의 얘기에 등장하는 거인의 가방 속에서 나온
가장 비현실적인 성(城)조차 최신의 공장보다 추악하지는 않으며, 아주 현실적
인 의미에서 그보다도 훨씬 더 실제적이다. 실크해트나, 보기에도 끔찍한 환경
의 공장이라는 오늘의 모순에서 잠깐 도피할 수도 그것을 비난할 수도 없단 말
인가? 모든 문학중 가장 도피적인 문학으로 꼽히고 있는 과학소설에서도 더러
워진 인간 환경과 인간성이 사라진 기계문명은 맹렬한 비난을 받고 있지 않은
가? 동화와 전설에 언제나 등장하는 보다 의미심장한 '도피주의'가 있다. 인간이
굶주림, 목마름, 가난, 고통, 슬픔, 불공평, 죽음과 같은 어려움에 부닥치지 않
을 때라도 제한된 것이나마 몽상의 이야기가 도피와 야심과 만족감과 위안을
제공했다. 아무도 나무랄 수 없는 약점이고 호기심이었다. 고기처럼 자유로이
심해를 찾아간다든지, 새처럼 소리 없고 우아하고 경제적으로 날고자하는 동경
심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좀더 나아가서는, 다른 생물과 대화를 해 보고
싶은 바램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몽상의 이야기의 '위안'은 물론 해피엔딩에서 온다. 비극이 진정한 형태의 연극
이듯이 해피 엔딩이야말로 몽상의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다. 몽상의 이야
기의 위안은 해피 엔딩의 즐거움이며 더 정확히 말해서 좋은 의미의 파국(破
局), 예기치 않은 즐거운 전환(轉換)의 즐거움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도피자
의, 또는 도피주의적 즐거움은 아니다. 몽상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종말의 즐
거움은 예기치 않은 기적처럼 은총과 같다. 그것은 즐겁지 못한 파국의 존재,
슬픔과 실패의 존재를 부정하는 배타적인 즐거움은 아니다. 그것은 최후의 패배
를 부정하며, 반짝 빛나다 사라지는 즐거움, 세속의 벽을 넘어 슬픔처럼 폐부를
찌르는 '즐거움'을 경험케한다는 점에서 복음적이다.
몽상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건이 아무리 황당무계하고, 모험이 제아무리 환
상적이고 끔찍하다고 하더라도 귀를 기울이는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이야기의
전환이 올 때, 한 순간 그들의 숨이 막히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게 하고,
어떤 형태의 문학이든 진지한 문학만이 줄 수 있는, 폐부를 찌르는 슬픈 눈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훌륭하고도 완벽한 몽상의 이야기의 커다란 특징이
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제 2의 세계, 팬터지를 창작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모두 어느 점에서는 환상 아닌 현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기를 바라며, 보다 리
얼리티에 접근하기를 희망하고, 그들의 이야기의 뿌리는 현실세계에 있으며 그
리고 현실세계로 뿌리가 뻗어가게 되기를 바란다. 리얼리티의 일면이 없는 작품
에서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다. 하지만 성공한 환상소설의 특이한 즐거움은 내
재적(內在的) 리얼리티와 진실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반짝거리며 읽는 이의 마
음을 밝혀주는 환한 빛의 '섬광'이 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
의 슬픔을 위한 '하나의 위안'일 뿐 아니라, 하나의 만족이며 "그게 사실일까?"
라는 의문에 대한 하나의 진지한 해답이다. "당신의 작은 세계를 잘만 구축해
놓았다면, 그것만으로 그 세계는 참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