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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의 삶

timid 2013. 5. 18. 18:33

 

나는 명문가의 규수로 태어났다. 어머니처럼 평생 아버지를 내조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필하며

사는 삶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여인은 사내의 그림자가 되어사는 것이 미덕임을 어머니의 삶을 통해 보았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왕비를 배출했다. 내 나이가 혼인의 때가 된 무렵 마침 왕의 가례도감이 열렸고 나는 기대했다.

첫번째 가례도감에서 나는 아버지가 유배되어있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못했다. 체면상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분하고 원통했다. 가례도감에 올라갔던 규수는 왕의 여인이라 하여 다시는 다른 남자와의 혼담도 오갈 수 없게 되는 것인데

 그럼 나는 어찌 살아야 하는가. 막막하면서도 함부로 눈물을 흘릴 수도 아버지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살아오셨으니까.

반가의 규수들의 선택지에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은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어찌된 일인지 첫번째 가례도감에서 채택되었던 중전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아버지는 해금되어 관으로 나아가셨다. 전에 없이 아버지의 위세는 당당했고 나의 간택은 당연시되었다.

마치 내가 왕비가 되는 것은 숙명인 것 같았다. 들뜬 마음으로 입궐했다. 어머니처럼 지아비를 살뜰히 내조하며 살리라.

국모로서 어진 어머니의 모습도 보여주리라. 기쁘게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아비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녀는 남편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신분이 천하다. 궁녀로 들어오기 전에는 남인들의 환국에 가담한 자의 서녀였다고 한다.

몰락한 남인이자 중인인 아버지와 첩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그녀와

현재 최고 권력을 누리고 있는 내 아버지와 현숙한 정실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 나.

미색이 아름답다. 총명하다. 하지만 질투하는 내 마음을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된다. 아니 그녀에게 내가 질투를 한다니

그 감정 자체가 부끄럽기 짝이없다. 부러움, 질투를 느낄 이유가 전혀 없는 천하디 천한 존재다.

 내가 굳이 내색을 내지 않더라도 내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람들이 그들의 권력을 위해 나를 이곳에 들였으니

나를 통해 남편의 후사가, 이 나라의 왕이 될 아이가 태어나기를 누구보다 원할 것이니까. 그리고 어머니가 그랬듯이 조용히 내 질투심을 접어두고 현숙하게 그를 연모하다보면 어머니가 오라버니들과 나를 낳았듯이 나도 내 남편의 자식을 낳고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질투심이 나도 참을 수 있었다.

결국 천한 그녀는 시어머니와 신하들에 의해 출궁당했고 나는 당연히 이제는 남편이 나를 바라봐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내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얻고자 하는 모든 것은 사실 처음부터 내 손안에 다 들어와있었고

내가 조금이라도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 몸종과 내 부모님은 내 세상은 그것을 내 손 안에 꼭 쥐어주었다.

욕심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갖고 싶어하는 아름다운 옷과 장신구, 부모님의 사랑, 친구들의 부러움 다 내 것이었는데

어떻게 남편의 사랑은-연적이 자리를 비웠는데도 얻을 수 없는 것일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쫓겨났던 그녀의 서기(瑞氣) 어린 눈빛에서, 그 눈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빛에서 나는 알게 되었다.

질투할 가치가 없다고 느꼈던 그녀는 내가 가지려고 한 적 없지만 내가 가져볼 수도 없는 무언가를 마음 속에 지닌 사람이며 그것에 끌리는 남편의 마음이 바로 사랑이라는 걸.

나는 줄곧 교태전에 앉아 있거나 내명부의 일을 돌보며 그로 인한 애끓음으로부터 냉담해지기 위해 애썼지만

밤마다 찾아오는 외로움에 파묻혀 있을 때나, 두 사람의 아름다운 광경을 그저 우아한 얼굴로 지켜보아야만 할 때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뜨거운 무엇을 부정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받을 때 그사람에게서 풍겨나오는 사랑스러움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있는 사람의 총기어린 눈빛

그것은 아버지의 사람들이나 궁 안 사람들에게 '색기'라고  종종 폄하당했지만 분명히 그것은 '열정'이 내눈에 보였다.

내 안에 뜨거운 '무엇'은 나는 그것을 살면서 단 한번도 갖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밀려오는 강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 속에서도 그저 묵묵히 욕망하는 것을 바라봄으로 내 안에 그녀의 열정과도 같은 것이 끓어옴을 애써 가라앉히고

진정시켜야하는 나날들에 지쳐갔고 더이상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헛된 바람을 갖는 것도 치욕스러웠다. 

살면서  한 번도 무엇을 간절히 원해본 적  없는 내게 

왕의 사랑과 장옥정의 열정은

내가 살면서 가장 간절히 원했던 것인 동시에 내가 평생 온전히 내것으로 삼을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어머니도 혹시 알고 계셨을까? 아니 어머니는 평생 그것들을 모른 채 그녀가 가진 것들안에서

그것이 얼마나 바보같은 편안함인지도 모른 채 현모양처로 사셨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아버지가 동료들과 찾아가는 색주가에서 아름다운 기생들과 어울리고 축첩을 하셔도 그녀들에게는 옥정이 가지고 있었던 열정이 없었고 아버지도 그녀들을 전심으로 사랑하신 적 없기에 어머니는 사랑도 열정도 모르고 사셨다.

그저 참고 자식들을 바라보며 사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환경에서의 가장 큰 안돈이자 행복이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이제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내게 주어진 것들이 다 인 줄로만 알았던 이 곳은 편안한 지옥과도 같다.

옥정과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은 내게는 선악과를 먹은 일과도 같다. 눈은 뜨여졌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일 뿐인 지금을 나는 어찌해야한단 말인가?

 

 

 

 

어릴 때 우리집은 꽤나 유복했었다. 아버지께서는 역관으로서는 당대 최고의 자리에까지 올라

사람들은 우리집을 우러러봤고 비록 신분은 양반만 못하지만 부끄럽거나 부러움을 가르치신 적 없었다.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긴 했지만 아름다우셨고

오라버니는 무과에 급제해 밖에서는 이름을 날리는 멋진 대장부였으며 나는 귀애받는 막내딸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날 뜻하지 않는 사건에 휘말렸다.

양반들의 정치싸움에 끼어든 것은 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란 것을 알기에

지금도 난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지만 우리 가족들의 삶은 하루 아침에 망가졌다. 아버지는 홀연히 끌려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나는 노비가 되었다. 관직을 빼앗긴 오빠는 유랑했고 나는 내 삶의 역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근근히 죽지 못해서 살았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입궁의 제의를 받게 되었다.

모든 것을 얻거나 잃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잃는 것에 확률이 더 높았다.

풍문으로 들어본 궁녀의 삶이 그러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갖은 예도를 엄격하게 훈련받은 후에는 음식을 만들거나

왕실 어른들의 곁에서 모시거나 바느질을 하는 등 왕실의 수발을 들며 평생을 살아야한다.

 운좋게 왕의 눈에 띄여 승은상궁이 되기도 하지만 여인들이 넘치는 그곳에서

왕의 사랑은 오래도록 움켜쥘 수 없어서 쉽게 버려져 부질없는 투기를 받으며 살기도 한다고 했다.

더 운이 좋게 왕의 아기를 낳게 되면 첩지를 받을 수도 있지만 수많은 궁궐의 어르신들의 눈치밥을 먹고

정치하는 어르신들의 꼭두각시가 되기 쉽상이라고도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많이 사랑하셨다. 어머니의 젊은 생에 누렸던 단란하고 유복한 가정은 그 곳에 없었다.

여인으로서의 삶은 거의 포기한 채 적으나마 꾸준히 나오는 녹봉을 집안으로 보내어 삶의 보탬이 되는 것.

궁녀가 된다면 최소한 그것만은 보장될 것임이 확실해보였다.

입궁 이외에 내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이렇게 살다가 아버지 나이뻘의 무서운 늙은이의 첩이 되어 살아가는 것.

아마 잠깐 늙은이의 비위를 맞춰주다보면 예쁜 옷과 장신구와 돈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정실부인의 눈치밥을 먹으며

아니면 어머니와 이렇게 근근히 버티며 오라버니가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고만고만한 남자를 만나 아기를 낳고 근근히 그냥 그저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것.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내게 최선의 선택은 입궁이었다.

난 어릴 적부터 예쁘고 총명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막내로 크면서 어떻게 사랑을 받아야 하는지도 몸에 배어 익히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왕의 눈에 띄면 승은상궁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정치하는 어르신들의 제의이니

내가 왕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설령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궁안에서 일을 하며 살면 꾸준히 녹봉이 나간다. 고생하시는 어머니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오라비의 삼 시 세 끼는 책임질 수 있다. 누군가의 여자가 되어 그저그런 삶을 사는 것보다는 그냥 한 사람의 직업인이 되어서 내 가족이라도 책임질 수 있는 게 나을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궁에 들어갔고 내 생각대로 왕을 만났다. 늙은 할아버지같을 줄 알았던 왕은 젊고 나를 많이 귀애해주었다.

임금님들은 바쁘다고 들었는데 때때로 들러 나를 보고 가고 달콤한 말을 하는 그 사람이 나도 좋아졌다.

 궁안에서 내가 기대했던 건 그저 승은상궁이라는 사회적 지위정도 였는데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의 지위가 높아짐을 느낄 수록 욕심이 났다. 사람들의 투기가 심해도 상관없었다.

이 궁 안에 연인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으니까 그것으로 충분히 투기도 시샘도 버티고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강제출궁을 당했다.

갖은 시샘과 압박으로부터 나를 유일하게 지켜주던 바리케이드. 그 사람의 사랑으로부터 나는 강제로 배제당하고 말았다.

꿈을 꾼 거라고 생각해보려고도 했지만 이건 내가 입궁전에 생각했던 경우의 수 바깥에 있는 것이라

나는 당황했고, 좌절했고, 아팠다. 아직 어린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또 다시 시련이 올 수 있는 것인지.

내 선택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렵게 선택한 것이기에 어떻게든 궁에서 살아남아야만 했는데

지금 이상황에서는 궁궐에서 일을 할 수도 없고 돈을 벌 수도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왕이었으므로 나는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금지당하게 되어버렸다.

이젠 누군가의 첩이나 아내로서의 삶이었던 선택지마저 닫혀버린 것이다.

절망의 골이 깊었고 그럴수록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리움과 염정이 깊어졌다.

그사람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프고 답답했다. 

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과 후의 나는 너무나 달라져있었다. 남은 선택은 두 가지뿐이었다. 죽거나 궁으로 돌아가거나.

하지만 죽을 수 없었다. 내가 죽어버리면 내 어머니도 죽어버릴 것이다. 내 오라비는 돌아올 곳을 잃게 되고.

나는 나를 밀어낸 사람들에게 영원히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그 사람과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나를 잊고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될테지만 그것을 감내할만큼 내 사랑은 미적지근하지도 관대하지도 않다.

 

돌아가야만 했다. 그것은 내게 남겨진 마지막 선택지였다.

돌아가야 내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먹여살릴 수 있다. 어쩌면 어린날의 영화를 다시금 맛보여드릴 수도 있다. 그리고.

나와 그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것들을 내 발 아래 둘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어떻게든 그 기회를 만들어낼 것이다. 나는 처절하게 그들에게 복수하리라.

그들처럼 고상한 척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럽게 고초겪게 하는 대신 내가 그들의 위에 있다는 것을 사는 동안 내내 각인시키며 속으론 이를 갈면서도 그 날카로운 이를 감히 내 앞에 드러내지 못하게 높은 자리로 올라가

그들을 내 발 아래 두고 하나하나 즈려밟아 주리라.

그리고 그 사람을 내 마음껏 사랑할 것이다. 누구의 투기도 누구의 시샘도 그 사람을 향한 내 사랑을 끊을 순 없을 것이다.

 

어린 날부터 고초를 겪으며 살았다. 나는 사랑으로 강해졌고 고통으로 견고해졌다. 내 아름다움에 그 사람이

나를 더 사랑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나의 아름다움을, 내가 얻게될 권력을, 지위를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갖게 될 그 모든 것들 뒤엔

그들이 가진 적 없었던 삶의 역동과 고통과 열정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