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의부스러기

enemy of the STATE

timid 2007. 1. 31. 00:39

 

[Who are they?]

 

오랜만에 좋은 영화 한편을 봤다. 수퍼액션에선 간간히 이런 좋은 영화들을 방영해주는데 내가 오늘 이영화를 본건 정말 행운이었다. 요즘 노암 촘스키의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를 보면서 그동안 내가 당연하게 생각해오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서 난 어느새 냉소적이고 삐딱한 그러면서도 머리속에 든 거라곤 얄팍한 습자지 지식밖에 없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영화는 그런 나에게 뭐랄까,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미국이라는 괴물을 좀 더 세련된 시각으로 보게 해준 영화였다. 물론 헐리우드에서 만드는 영화라는게 미국에 대한 환상을 키워줄뿐이기는 하지만 이 영화는 뭔가 달랐다, 아니 다르다고 믿고 싶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연신 내뱉은 말은 무섭다는 말이었다. 정말 우리나라도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 영화 속 미국 안보국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허구물이라기 보다도 현실을 재구성해놨고, 오히려 현실은 영화에서보다 더 치밀하고 끔찍할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한 사람의 상원의원의 권력을 위해 막대한 자본과 브레인들의 수색작업이 동원되고, 그 와중에 희생되는 그 무엇도 권력보다 더한 가치를 가질 순 없다. 이건 봉건사회 아닌가? 영주의 부름을 받은 기사들이 봉건 사회를 통제하고 농노들은 그것에 맞추어 노동하고 순종하는 삶. 오히려 현대 사회야 말로 이런 '농노'들이 상부 사회에 대한 어떤 저항이나 반감마저도 저지하고 교화시키는 봉건사회보다 더 무서운 사회 체계를 갖고있는 건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제 과학의 발달로 윤택한 생활 환경을 누리고 있지만 그 어느때보다 공권력에 노출되어있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국가치안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사방에 설치된 CCTV와 인공위성은 중세 어느 기사들보다 더 민주의 삶을 감시하고 통제한다. 언뜻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서 제시되었던 판옵티콘이 생각난다. 감시체계 안은 어둡기 때문에 밝은 바깥을 볼 수 있지만 피감시대상들은 어두운 감시체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 우린 흔히 보이지 않을 만큼 '작다'는 표현을 쓰지만,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힘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외면하거나 또는 외면하도록 조종당하고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은 'enemy of the state', 즉 국가의 적이다. 과연 국가의 적은 누구인가? 아니,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국가-the state'의 정의부터 먼저 내릴 필요가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 : [요약] 통치조직을 가지고 일정한 영토에 정주()하는 다수인으로 이루어진 단체.

                                                                                     - 네이버 백과사전

 

그럼 여기서 다시한번 우리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중심은 '통치조직'인가? '정주하는 다수인'인가? 영화의 주인공 로버트 딘은 우연히 대학 동창 다니엘의 -상원의원의 교사혐의를 명백히 증명해낼 영상물이 들어있는 핸드폰을 갖고난후 사회, 경제, 가정 모든 면에서 낭떠러지로 몰린다. 마피아인지, 노조 방해세력인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이들에게 쫓기면서 로버트는 끊임 없이 묻는다.

'who are they?'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끊임없이 서로에게 맞물려있는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작 '국가'의 자리란 어디인가.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눈이다. 우리의 눈을 가리기위해 갖은 온갖 자본을 투입하고 대중매체는 보다더 선정적이고, 화려한 이야기로 꾸며 우리의 관심을 돌리려고만 한다. 혹여 진실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그들의 주무기인 여론조작과 음모설로 진실을 은폐하고 위장하고, 아무도 관심갖지 않고 관심갖으려 하지도 않을때쯤 다시 고개를 든다. '국가안보'와 '사생활 침해'라는 양날의 칼을 쥔 공권력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우리. 똑똑하고 강직한 노조 변호사와 전직 안보국 출신의 천재 노인은 공권력의 감시에 통쾌하게 복수의 어퍼컷을 날렸지만 과연 아무것도 갖지 못한 우리가 할 수있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영화는 비록 통쾌하게 끝났지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멋진 반전은 후련했지만 생각할 수록 참 찝찝하다.

 

[ 우리가 늘 듣는 평화과정peace process이라는 말도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말에 이르는 사전적 정의는 '평화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언론에서는 이 용어를 그런 뜻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뜻인가? 그 용어를 사용하는 지금 현재, 미국 정부가 취한 모든 조치가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미국 언론에서 일사불란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볼 때 미국 정부는 언제나 평화과정만을 지원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미국 정부가 평화과정에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신문 기사들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그 어디에서도 찾지 못할 겁니다.                                       -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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