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장희빈과 인현왕후, 그 숙명의 대립 -2

timid 2006. 7. 29. 13:19


 

한번의 환국 이후, 붕당의 성립이래 초유적으로 남인들의 집권시대가 찾아왔다. 숙종 즉위 초 현종 대에 이은 2차 예송논쟁으로 남인은 서인들에게 눌려 살아왔다. 그런 그들과 손잡은 장희빈이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그들의 정계진출을 끊임없이 막고 있던 서인은 이제 없다. 서인의 거두였던 송시열이 희빈이 낳은 아들 균의 원자 책봉을 강하게 반대하다가 사약을 받았고, 이제 숙종이 서인 세력에게 종용받을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이번 환국은 그동안 당쟁에 휩쓸려 떨어져있던 왕권을 바로세우고, 그 왕권으로 당쟁을 이용했다는 면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아들이 원자가 되는 영광에 이어, 중전자리에까지 오른 장희빈은 남인이 정계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한 결정적 원인이 되어 준 동시에 6년 뒤, 그들이 또다시 정계의 마이너로 축출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고보면 정치니, 역사니 하는 것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이러니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장희빈은 중전의 자리에 오름으로서 온전히 왕의 사랑을 쟁취했다고 믿었을까. 숙종과 장희빈이 정말 사랑했던것이 언제부터 언제였는지는 서로가, 아니 각자 스스로만이 알고 있겠지만 어쨋든 사랑은 변하고, 사랑보다 강한것이- 적어도 그들에게는 권력이었다. 중인 출신의 장희빈은 갑작스럽게 얻어진 권력이 반갑고 계속해서 더 많은 권력을 누리고 싶었다. 신분 상승에 대한 신데렐라 컴플렉스인걸까. 열 두시가 되기전에 아니 열두시가 올 수 없게.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의 배후세력과 왕에게 요구했다. 부과 권력과, 사랑을. 숙종은 그런 그녀가 부담스럽고 지쳐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인현왕후에게 은덕을 입고 줄곧 그녀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무수리 최녀[훗날의 숙빈 최씨]는 국모로서의 소임을 다했던 인현왕후를 내쳤던 자신에 대한 자책과 회한을 털어놓을 쉼터가 되었을 수도 있다. 그녀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날로 도타와졌다. 새로운 연적의 등장은 장희빈을 더욱 악한 여자로 몰고 갔다. 그녀가 그랬듯, 최 무수리도 자신을 치고 올라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끊임없이 그녀를 견제하고 미워했다. 그녀의 이런 악한 모습이 숙종을 더 멀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사랑은 자꾸 커져가는데, 한 사람의 사랑은 자꾸 다른 곳으로 가고 있었다. 진정한 비극은 그 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는 지도.

문제는 최 무수리가 인현왕후의 사람이었다는데서 더 커진다. 자연스럽게 서인과 같은 배를 타게된 최 무수리는 본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떠오르게 되고, 인현왕후의 복위에 요인을 제공하기까지 이른다. 결국 중전 장씨의 부덕한 행동과, 남인들의- 특히나 외척들의 횡포는 민심을 동요케하여 숙종은 또 한번의 환국을 주도한다. 중전 장씨는 다시 희빈의 자리로 돌아갔고 -원자의 생모이기 때문이었다- 6년동안 사가에서 서럽게 살아오던 민씨는 다시 중전 자리로 돌아간다. 차라리 그렇게 균형을 이루며 살았으면 차라리 좋았을까. 인현왕후의 성품이 자애로워 원자를 친자처럼 아꼈고, 희빈-인현왕후의 대립구도는 이제 최 무수리- 이제는 숙의 최씨의 등장으로 한결 안정을 찾았다. 차라리 이대로가 좋았을거다. 하지만 희빈은 여기에서 다시 돌아갈 순 없었다. 6년동안 누리던 한없는 영화, 그 달콤함이란 것은 그녀를 끊임없이 갈구하게 만들었다. 6년동안 얻어온 부와 권력, 사랑. 무엇 하나도 다시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원자의 생모다. 민씨가 중전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 자리를 차지할 영순위는 원자의 생모, 바로 자신이다. 민씨만 없어지면, 민씨만 사라져준다면 지난 날의 영화를 다시 누릴 수 있다. 민씨만 사라져준다면. 그래서 그녀는 무서운 계획을 꾸민다. 민씨가 사라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권력이란 것이 이래서 무서운가 보다. 조선에서 누구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영민한 한 여자를 돌이킬 수 없는 과오로 몰아넣는. 그녀는 무당을 불러 신당을 차리고 민씨를 저주한다.  복위된지 머지않아 인현왕후는 뜻밖의 죽음을 맞이한다. 앓고있던 등창이 사인이었지만 서른 다섯의 아직 이른 나이였다. 민씨가 복귀한 뒤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이를 좌시할 리 없다. 희빈이 단죄받을 죄명은 너무나 명백했지만 그렇게 그녀에게 사약을 내린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세자의 생모였다. 그녀의 행형문제는 단순히 그녀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 세자의 장래에도 큰 핸디캡이 될 것임은 너무나 분명했다. 하지만 서인 중에서도 좌파적 성향이 강한 노론계열에게는 그것조차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젠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 있기 때문이다. 희빈이 사사당한뒤에, 세자의 입지가 위태로워 끝내 폐세자 된다하더라도 연잉군을 추대하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그편이 더 나았다. 희빈 장씨가 남인계 인물이기 때문에, 현 세자 역시 남인의 성향이 다분할 수밖에 없고 그의 즉위는 오히려 자당(自黨)에 득이 될게 없었다. 우파적인 소론의 의견은 달랐다. 세자에게까지 그 어미의 죄가 미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국본, 國本 한자 그대로 나라의 근본이 되는 세자이다. 그 어미의 죽음은 세자 뿐만 아니라 후대에 그가 즉위했을시 왕실의 위엄에도 치명적일 뿐더러 그것은 왕권과 연결되어 나라 전체의 기강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렇게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장희빈의 처리 문제로 극렬하게 대립하기에 이른다. 생각해보면 붕당정치의 궁극은 참 한심하기까지하다. 처음엔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라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을지 모르나 지금의 그들은 환국을 주도하는 왕의 칼날 앞에 그들은 관료직이라는 밥그릇을 놓고, 나아가 자기들의 생명줄을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을 연출해내고 있었다. 훗날 소론을 축출해낸 노론은 또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뉘고 종국에는 몇몇 유력한 가문들이 독주하는 세도정치를 자행하니, 그렇게 해서 그들이 얻은 정치적 성과가 과연 무엇인지 혀가 내둘러진다. 여튼 이런 대립속에 숙종은 노론의 편을 들었다. 숙종은 돌아온 인현왕후를 죽을때까지 질투한 희빈을 더이상 사랑할 수 없었나 보다. 그렇게 사랑은 변할 수도 있는 것인가보다. 사랑했던 여인을 죽일 수 있을만큼. 결국 인현왕후와 장희빈 두 사람의 궁중 속 대립은 두 사람이 모두 죽어서 끝을 낼 수 있었다. 이 비극이 숙종 이후 20대 임금 경종의 치세기간까지 미쳤으니, 참 안타깝고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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