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막히는 리얼리티, 슬픈 원혼의 기억- 혈의 누.
난 김대승 감독이라는 사람을 이 영화로 처음 알게 되었다. 충무로에서 그래도 잔뼈가 굵었으니 이런 대작 장편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을테지. 어쨋든 그가 신인이라하면 신인으로서 소화해내기 어려운 이 영화를 너무 잘만들어서 박수를 보내고 싶고, 또 신인이 아니더라도 박수를 보내고 싶다.
너무나 사실적인 살해장면 때문에 [공영방송KBS가 뽑은 특선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편집은 거의 되지 않은것같았다. 그러면서 떡하니 붙은 노란딱지 15세. 방송 심의규정이 언제부터 이렇게 관대해졌는지. 여튼 그이야기는 넘기고]몇 번씩이나 채널을 돌려야 했지만 스토리의 원활한 전개와 각 인물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그동안의 잔혹스릴러가 갖고있던 치명적 허점을 잘 극복해낸 영화임을 증명했다. 누가 만들었든 간에 잔혹스릴러라하면 [스릴러]보다는 [잔혹]에 초점이 맞춰지기 십상이라, 살해의 목적조차 불분명하게 스토리를 겉돌았던 기존의 그것들과 [혈의누]는 차별화된다. 또한 18세기 조선의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세트, 그리고 당시 '그랬을법한' 조선식 과학수사를 세밀하게 그려낸 점도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아쉽게도 개봉 전후 스포일러들의 엉뚱한 비밀발설과 영화자체의 잔인함 때문인지 기대만큼의 흥행을 얻지는 못했다. 200만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보기는 했지만 영화의 작품성을 볼 때 그보다 더 많은 관객들을 끌만한 영화는데도 말이다.
당시는 일본과 청의 침략도 잠잠했던 시기였다. 소슬한 안정속에서 조정은 부패해갔다. 당쟁은 대의를 잊고 사욕에 눈이 멀어 타당을 비방하는데서 그치지않고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정쟁을 일삼았다. 정조가 죽은 후 탕평이라는 그늘아래 가리워져있던 정쟁이 노골화되었다. 18세기의 조선은 노론계 세도가들의 정략에 온 나라가 피로 물들고 있었다. 그들은 온전한 권력을 손 안에 넣기 위해 소론과 남인을 천주학쟁이로 몰아 조정에서 내쫓고 죽였다. 잔인함의 극한은 서슬 푸르게 매일매일 형장을 피로 적셨다. 민초들은 강한 것이 두려워 침묵했다. [혈의 누]는 여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조선판 [마녀 재판]. 그 속에 억울하게 죽고 유배당한 이들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역사는 그런 미시적인 것에 주목하지 않았다. 그저 [왕보다도 위에 눌러앉은 세도가들은 매일 형장의 피를 제물삼아 부와 세를 축적해갔다.] 이정도 까지를 우리에게 알게 할 뿐이다. 감독은 그 사실fact에 개연성fiction을 입혀 새로운 스타일의 faction을 구사했다. [이런 일이 있었을 수 있겠구나.] 관객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결국 이원규[차승원] 역시 진실과 그에 대한 부끄러움 대신 '무관으로서의 명예'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결국 그의 아버지와 그는 다르지 않음을 시사하는 동시에 오늘날 진실을 너무도 쉽게 외면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지적한다. 또 그 뒤엔..
뼈에 사묻히는 원한. 그 서러움 앞에서 그들은 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나. 그들은 그저 권력이 쥔 칼이 무섭고 권력이 주는 재물을 탐했다. 그건 인간의 본성과도 같은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탓할 수 만도 없다. 그들의 뒤에서 그것을 너무나도 잘 활용했던[?], 눈먼 백성을 제멋대로 조종했던 권력이란 것은 얼마나 사악한 것인가. 영화는 조용히 묻고 있다.
사람은 언제부턴가 결코 선하지 않다. 눈앞의 이익에 제 스스로 눈을 빼고 입에는 재갈을 물린다. 진실을 보려하지 않고 인정하려하지 않고,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 어리석은 사람들 속에 익숙한 우리. 바로 나에게. [혈의 누]는 18세기의 그 누군가가 전하는, 김대승 감독이 대독[代讀]해주는 슬픈 경고장일지도 모른다.
[네놈의 애비가 입신양명을위해 포기한것이 무엇인지 아나? 바로 부끄러움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자가 사람인가..? 짐승이다.. 너도 나를 죽이고 평생 칼로 부끄러움을 덮고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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