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과 거짓말 - 쌍화점
이렇게 리뷰를 쓰고 싶게 만드는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본 영화들은 몇 편 더 있었지만 특별한 감흥이 없거나 밋밋한 스토리로 영화를 다 보자마자 금새 잊혀진 것들뿐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영상과 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유하감독의 영화는 늘 인상 깊으면서도 불쾌하다. 그의 영화를 모두 다 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봐온 그의 영화는 늘 그랬다. 대중성을 지향하는 많은 감독들이 이전에 사용한 바 있었던 결혼과 연애 사이의 딜레마(결혼은 미친짓이다)라든가 70년대 학창시절의 추억(말죽거리 잔혹사), 조폭(비열한 거리), 그리고 사랑(쌍화점) 등의 소재를 가지고 그는 늘 조금은 삐딱하고 어두운 시선으로,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괴롭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마치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고통스러운 선택의 기로에 선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의 영화를 믿고 보는 것은 요즘처럼 깊은 생각이나 감동을 주는 한국 영화가 드문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시선은 깊고 통찰력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구체적이지는 않다. 그가 보여주는 장면은 다소 자극적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그 너머에서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그의 보이지 않는 메시지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강렬한 화면에 압도된 관객은 그 메시지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간에)강한 인상을 받았고, 그것을 보는 시각에 따라 평가가 엇갈렸다.
감독은 사랑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왕과 왕비, 홍림의 감정곡선을 예리하게 잡아냈다. 아마도 다소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들이 많았던 것도 그들의 감정을 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에서 나온것이 아니었나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영화의 너무 과하다 싶을 정도의 뭇 장면들을 변호하고 싶진 않다. 자객들을 진압하는 건룡위의 모습이나 홍림과 왕비가 서로의 사랑을 인식하고 깊어지는 단계는, 영화 속에서 꼭 필요한 장면들이었지만 그 장면들을 묘사하는 측면에서 지나치게 자극적이진 않았나 우려하는 마음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그러한 자극적인 장면들에 눌려 빛을 발하지 못하게 되진 않을지.
무튼 색감에 대한 세심한 배려와 엇갈린 사랑이 가져온 비극적 결말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영화는 '조선남녀상열지사-스캔들'과도 견줄 수 있고 불가피한 육체적인 결합을 통해 서로에게 갖고 있던 증오의 경계를 풀고 격정적인 사랑으로 빠지는 두 남녀주인공의 모습은 '색,계'와도 비슷하다. 세 영화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물론 야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꿈꿔오던 사랑의 다소 낯선 이면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이다.
사랑은 두 사람과 그 이외의 사람들 사이에 경계를 긋고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만들게 하는 동시에 너와 나, 마음과 마음, 사랑을 방해하는 신분, 성별, 어떤 것이든 그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도 있지만, 욕정이나 질투로 변질되어 모두가 행복할 수 있었던 안정적인 세계를 깨고 파국으로 몰고가기도 한다. 영화는 후자에 속하는 사랑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이 세상의 수많은 멜로 영화 속 사랑은 너무나 아름답고 쉽다. 시련 따위는 사랑에게는 가뿐히 넘어설 장애물에 불과할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감히 사랑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한다.
이 영화 속의 사랑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찾아와서 모두를 곤란에 빠뜨렸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걸 걸어서라도 지키고 싶을 만큼 소중했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무너뜨려서라도 곁에 두고 싶을 만큼 치열했으며
그 사랑으로 인해 모든 것이 끝날 것임을 알면서도 망설임 없이 뛰어들만큼 강렬했다.
그렇기 때문에 '번지점프를 하다' 속 이병헌의 마지막 대사가 그랬듯
우리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언젠가 "이야기의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감독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다. 정말 영화는 그랬다. 모두가 앞으로도 길이길이 불행한 삶을 살것을 나도 알겠으니까 제발 이제는 멈춰주었으면 좋았을 법도 한데 영화는 끝의 끝으로, 엇갈렸던 모든 사랑이 끝날때까지 정말 쉼없이 너무도 치열하게 달렸다. 마치 미칠 듯한 사랑의 기억을 안고 고통으로 점철된 순간 순간을 견디며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홍림이처럼. 이야기는 모질게도 길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불현듯 찾아온 홍림의 죽음은 곧 사랑의 끝이었다.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도 그랬던 끝 역시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홍림은 목숨이 끊어지는 동시에 자신의 전쟁처럼 잔혹했던 사랑과 사랑처럼 달콤했던 전쟁 모두를 끝낼 수 있었다.
자신을 사랑했지만 자신이 증오했던 왕에게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서 왕이 앞으로의 날들에 품었던 홍림에 대한 모든 미련의 끈을 끊어버렸다.
당신을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노라 고백하면서 그에게 남긴 상실의 상처를 고스란히 되갚아 주었다.
사랑하지만 결국 사랑해선 안되는 왕후에겐 그녀를 위한 최선의 선택, 영이별을 선물했다.
그의 짧고 치열했던 삶은 곧 사랑의 역사가 되었다.
그가 살아가는 동안 누군가는 그를 사랑했고 누군가는 그의 사랑을 받았다. 사랑을 받는 순간도 사랑을 주는 순간도 그에게는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그 사랑이 준 고통 때문에 온몸이 찢겨나갈 듯 아프고 역사속에 영원히 씻지 못할 대역죄인이라는 멍에를 쓰고 가야했지만 사랑을 위해 모든것을 걸고 생의 끝까지 그 사랑을 지켰던 그의 삶을 어떻게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사랑은 무서우리만치 그를 죽음으로 몰아세웠지만 그의 삶은 사랑으로 인해 온전해질 수 있었고 찬란할 수 있었다. 모든걸 바쳤던 불꽃같은 사랑을 나는 마음속으로만 몰래몰래 부러워할 뿐이다.
여담. 주진모의 캐릭터과 과연 공민왕에게 맞는것이었을까?
'사랑', '패션 70',s' '무사' 등 많은 작품에서 줄곧 남성스럽고 강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 주진모. 뚜렷한 이목구비에 중저음의 목소리까지 그는 그런 역할을 맡기에 충분한 배우다. 하지만 이 영화 속 공민왕을 연기한 그는 마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사람마냥 어색해보였다. 영화 속 공민왕은 섬세하고 지독하기까지한 사랑의 화신이면서도 제왕으로서의 타고난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강렬하고 잘-생긴 얼굴은 극중 특히 홍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부분 속 공민왕에게 몰입하는 것을 오히려 방해했다. 물론 주진모의 혼신을 다한 연기에는 박수를 마지해 않지만 중성적인 매력을 풍겼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예쁜 꽃미남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조인성의 상대역으로 많은 여성팬들이 원했던 강동원은 공민왕이 지닌 본연의 카리스마를 살리는 데는 너무나 선이 고운 배우인데다 홍림과 왕후의 사랑이 두 사람의 비쥬얼에 밀려 정말 동성애만을 담고 있는 대중성을 의식한 퀴어 영화로 둔갑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딱히 좋은 배우가 생각나진 않고 예전에 '신돈'에서 공민왕을 연기했던 정보석씨를 포스팅해본다. 물론 조인성과 송지효 누구와도 정보석이 어울리는 얼굴은 아니지만(;;) 공민왕 자체의 캐릭터만을 봤을 때 정보석씨만큼 적격인 사람은 찾기 힘들 것 같다. 키아누 리브스를 연상시킬만큼 잘생긴 동시에 관객을 압도할만큼의 카리스마를 갖고 있으며 특히 '달콤한 인생'에서 주인공의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내면 연기를 탁월하게 소화한 측면으로 보았을 때 이런 역할을 맡겨도 정말 잘해내지 않을까 싶다.
무튼간에 내가 이렇게 혼자 캐스팅을 고민해본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이 영화는 배우들이 선택하기 꺼려했을 거라는 것이 장면 곳곳에서 보였다. 그럼에도 멋진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과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스텝과 감독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으려 한다. 부디 이 영화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감독의 의도대로 사랑의 덧없음을 표현한 좋은 영화로 평가받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