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도 더 되었지만 좋았던 전시회 - 미술의 표정 展
[움직임의 표정_ 미술작품의 분위기에서 느껴지는 기쁨이나 슬픔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기
쁨과 슬픔의 동작이 있는 그 자체에 녹아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의 주의력을 끄는 강한 시각적 요인이다. 실제로 우리는 부동의 사물에서서보다 운동이 있는 사건에 더욱 관심을 둔다. 이 때문에 모든 미술작품에서 운동은 중요한 형식요인으로 사용된다. 여기서 운동은 움직이는 대상 뿐만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형태의 모영과 방향, 밝기, 명도 등에 의해서도 나타난다., 일례로 화살표 모양도 운동감을 준다. 따라서 실제로 무엇이 행해지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보다 운동의 효과를 어떻게 적절히 표현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풍차 날개가 수직이나 수평 위치에 있는 듯이 그려지면 우리는 그것이 움직이고 있다고 가정해도 멈춰져 있는 것처럼 보지 않는가? 이처럼 시각적 움직임은 형과 색채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각 성질 중 하나이며 지각현상에 존재한다. 따라서 움직임이 기쁨과 슬픔같은 표현을 만들어 내는것이다.]
이 테마의 전시실에서는 움직임 자체보다 움직임을 어떻게 더 실감나게 표현했느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앞 전시실에서 보았던 분명한 오브제보다는 보는 시각을 어디에 두냐에 따라 달라지거나, 마구 흔들린 사진처럼 오브제의 형체가 거의 드러나지 않게 함으로써. 또는 움직임을 몇가지의 사진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보여주면서, 아니면 마치 2D 애니메이션처럼 빠르게 넘김으로서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움직임을 표현했다. 신기한 것들이 많아 이번에는 사진을 많이 첨부했다. 먼저 나는 이 전시실의 첫 작품에서 감탄을 마지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작품! 함진님의 [찌끄레기 인간들]이다.
처음엔 안내원이 깜깜한 암실로 손전등만 주고 나를 안내하길래 이게 뭔가 싶었다. 뭔가가 있을 테니 잘 찾아보라고? 방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천정에도 구석에도 먼지하나 없는 이 방. 안내원이 바닥쪽으로 손전등불을 켜자 나도 모르게 '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밑바닥과 벽 사이 그 좁은 공간에 마치 개미처럼 조그마한 [찌끄레기 인간들]이 살고있었다. 위 사진처럼 뭔가에 쫓겨 도망가기도 했고 음식을 먹고 있기도 했고 무거운 짐을 나르기도 했다. 하나님의 친구들이 그의 피조물을 소개받을 때도 이런 느낌일까? 이 작품은 우리가 손을 휘저어도 아무것도 없어보이는 허공에도 아주 작지만 뭔가가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작품은 작품을 보고 있는 관람객의 움직임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 작품의 내용을 이루었다. 거울을 달아놓은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 작품도 실제로 보면 그 느낌이 더 강하다. 이 것은 수묵화도 아니고 플라스틱 조형물도 아니다. 방충망으로 붙이는 얇은 철망으로 이런 운동감과 사실감을 재현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잘 믿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모습인데, 이 사진으로는 이게 환조처럼 이목구비가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석고상을 뜨기 전 그 틀을 그대로 이용하여 그 위에 색칠만 한 것이다. 좁은 소견으로는 사람 형상을 석고로 틀만 뜬 후 그 틀 그대로 작품으로 사용한 것 같다.
[공간의 표정_ 평면 위에 그려진 도형의 안쪽과 바깥쪽은 같은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지각적으로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에웠나느 포면은 형이 되려 하고 그렇지 않은 표면은 배경이 되려 한다. 여기에 다른 선들이 겹쳐지면 그 모양은 입체감과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 모양이 변형되거나 왜곡되어도 공간감은 생겨난다. 미술에서의 공간은 이차원 공간과 삼차원의 공간, 이 두개의 공간 사이 어딘가에 놓인다. 작품에서의 공간은 의도한 형태특성들을 조직화하여 전달하는 기초가 되며 동시에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 표현의 수단이 된다. 표현하고자 하는 다양한 심리적인 힘들이 공간에 의해 규정도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같은 사물도 작가의 공간 구성에 따라 달리 보인다, 이차원 또는 삼차원의 공간에 형과 색, 방향, 크기 형의 우치를 작가가 어떤 의도로 구성하느냐에 따라 원근법과 왜곡, 중첩, 서로 다른 공간의 공존등이 나타나고 이것이 작품 전체의 표정을 결정짓는 것이다. ]
화가는 마법사가 아닐까? 2차원 공간에서 3차원 공간의 느낌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3차원에서 형태를 변형시켜 본질과는 다른 것을 창조해내기도 한다. 2차원과 3차원. 현실적으로는 너무나 분명하지만 그림에서는 이미 르네상스시대에 원근법이 개발됨에 따라 그 구분은 무너졌고 그 무너진 경계를 걸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 테마의 작품들에선 그 애매한 경계를 재미있게 갖고 놀았던 화가들의 놀라운 솜씨들이 엿보인다. 창문너머로 보이는 맑고 깨끗한 하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창문인지 하늘인지 아니면 하늘을 가장한 또다른 무엇인지 우리는 제대로 지각하지 못한다. 화가들은 그것을 노려 공간을 제멋대로 갖고 놀고 우리에게 색다른 느낌을 안겨준다. [창문은 하늘을 담는다. 창문 안에는 하늘이 있다.]
나는 현대미술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현대'의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고전미술들보다 더 거리감을 느껴왔다. 보이는 것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의도대로 왜곡하고 과장한 작품들은 그 느낌이 가끔씩은 너무 과격하고 부대끼게 다가와서 나처럼 소심한 성격의 사람들의 눈에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날 내가 본 우리나라 현대미술은 참 재밌고 친근했다. '표정'은 화가도 관객도 누구도 지을 수 있는 인간의 것이기에. 미술이 짓는 표정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가깝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현대미술은 어떤 한 흐름이 주류를 이룰거 같지는 않다. 현대미술의 핵심은 작가의 의도 표현에 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미술 작품의 소재부터 그 표현방식, 전시방식까지 달라지기 마련이기에 관람객들은 작품을 비판하기 보다는 작가의 눈이 되어 바라볼 수 있는 넓은 안목을 가져야 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관람객들이 그런 넓은 안목을 기르기 위해선 현대미술이 현대인과 괴리되지 않도록 미술과 사람들을 친해질 수 있도록, 미술이 살갑게 다가올 수 있도록 화가들도 어느 정도는 노력을 해주어야하지 않나 싶다. 이 전시회는 그런면에서 의미가 크다. 앞으로 이렇게 관객에게 한걸음 더 친숙하게 다가오는 전시회가 많이 열려서 화가와 관람객들 사이의 소통이 보다 활발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ARTICLE
국악박물관에 갔다가 그냥 집에 돌아가긴 너무 아쉽고 공연을 보기엔 시간이 너무 없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예술의 전당 개관 20주년을 맞이하여 무려 특별전[!]이 열리는데 그 가격도 오천원이라는 가격에 (유명 서양화가들의 전시가 만원을 넘었던 것에 비하면 매우 저렴하기까지 해서) 냉큼 미술관 안으로 들어갔다. 전시회의 이름은 [오늘의 한국미술_ 미술의 표정]이었다. 미술의 표정이라.
'미술작품에서의 형태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창조됩니다. 작가들의 표현의도가 형태의 성질을 결정짓고 하나의 표정으로 나타납니다.'
생각하기도 전에 나를 맞이한건 위의 작품, 김주호님의 '대화'라는 작품이다. 갖가지 표정을 익살맞게 나무로 깎가 표현했다. 그냥 나무를 통째로 잘라 얼굴을 그린 작품도 있었는데, 나무에서도 사람의 냄새를 맡는 이 화가의 마음은 참 따뜻하지 않을까 싶었다. 인상깊었던 작품 중에 하나가 사람의 얼굴 밑에는 나무 밑둥으로 몸통이 만들어져있는데, 가운데에는 작은 창이 달려있어 그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관람객들이 볼 수 있게 되어있는 것이었다. 작품 제목은 [창문]. 창문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도 있었고, 쓰레기가 제멋대로 구겨져 들어가있는 것도 있었고, 거울이 달려있어서 내 얼굴이 빤히 보이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아예 뚫려있어서 뒤가 보이는 것도 있었다. 사람의 속내란 것을 이렇게 간단하게 그리고 관객들로 하여금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게 꾸며놓은 작가의 재기발랄함이 놀라웠다.
그 다음 작품은 이소영님의 [뒤돌아본 낯빛]이었다. 한-중-일 동양화에서 보이는 인물들의 다양한 표정을 한데 모아 그림으로 전시하기도 했고 음향과 함께 티비에 담기도했다. 여러가지 표정이 어쩜 그렇게 오묘하게 조합했는지, 그러고보면 사람의 표정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인데, 마음이란 것은 다 한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서 어딘가 조금씩은 다 닮은 구석이 있다. 그리고 웃다가 울기도 하고, 울다가 웃음이 나오는 게 사람의 묘한 감정이란 것이니까. 이소영님은 그 감정의 애매한 경계를 표현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혼자 생각해봤다. 혼자 문화생활을 하러 가는 길은 심심하고 한편으로는 쑥스럽기도 하지만 막상 가서 느끼는 것은 둘이서 갔을 때보다 더 클 때가 있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 때의 팁은 절대!! 집에서 나오는 길에 밥을 먹고 와야한다는 것. 나는 이 날 배가 고파서 처음 작품은 천천히 감상하다가 나중에가서는 뭐라도 먹고싶은 맘에 빨리 전시장을 나와버렸다.ㅠㅠ 재미있는 작품이 많았는데 그걸 하나하나 제대로 보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 전시 작품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런 글귀가 써져있었다.
[형태의 표정_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표정은 살아있는 유기체에만 한정되어있는것일까?
물이나 추상형태의 단순한 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서 다양한 느낌을 받는다. 특히 미술작품에서는 형태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창조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미술작품에서 이러한 형태를 통해 전달하는 의미는 그 형태 자체에 존재하면서 감상자의 지식 등과 결부되어 그 형태 자체를 초월하는 그 무언가를 표현한다. 하나의 원이 얼굴을 상징할 수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이처럼 의미와 의미를 표현하는 형태와의 관계에 따라 작품은 단수해보이기도 하고 복잡해 보이기도 한다. 작가의 표현의도가 형태의 성질을 결정짓고 하나의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표현이란 그 뒤에 마음이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표현을 전달한다.
그렇다. 작품에는 작가가 표현하려고 하는 오브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의 표현기법 역시 우리에게 뭔가 말하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민병헌님과 구본창님은 젤라틴 실버프린트로 사진처럼 사실적인 표현을 함과 동시에 더 깊은 느낌을 만들어냈다. 젤라틴 실버프린트, 어디서 들어봤더라 곰곰히 생각해보니, 몇달 전에 지은이와 보러간 리움 미술관 특별전에서도 [낙산]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떠올랐다. 내가 볼 수 있는 시야 그 이상의 넓고 아늑한 바다가 세폭의 큰 그림안에 펼쳐졌던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 이번 작품 역시 그랬다. 회색빛의 바탕은 겨울의 쓸쓸한 느낌을 한층 더 살리는 것 같았고 겨울 나무가지의 앙상한 모습은 그대로 드러나면서도 원근이 있었다.
권부문 - <낙산>
젤라틴 실버프린트란 그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인화지는 원지(백색종이)위에 동물(송아지)의 뼈와 가죽에서 추출한 젤라틴이라는 끈끈한 점액성질이 있는 아교 비슷한 것에 은(할로겐화은)을 섞어 적당히 숙성시켜서 유제를 만들어 바른것을 통칭 젤라틴 실버 페이퍼라고 하며 여기에 인화한 것이라고 한다. 끈적한 젤라틴에 인화한 것이라 먼 거리에 있는 것은 희미하게 표현이 되는 동시에 젤라틴 속에 쏙 들어가있어서 그 깊이감을 더했다. 작가는 앙상한 겨울나무 숲, 끝없이 펼쳐진 해변만 보여주고싶었던게 아니었을것이다. 이 표현기법을 통해 그가 두가지 풍경을 보면서 느꼈던 느낌까지도 전달하고 싶엇던 것일수도 있겠단 느낌을 얼핏 받았다.
도성욱님의 [조건, 빛]은 유화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처음엔 흰 바탕에 어둡게 그림을 그린 건지 아니면 어두운 바탕에 흰 색으로 포인트를 준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찬찬히 보다보니, 이 그림이 원래는 까만 캔버스에 밝은 색을 덧입혀 빛을 표현한 것이었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빛이 있기 훨씬 전에는 흑암이 천지를 덮고있었으니, 이 그림 안에는 천지창조의 시작이 보인다고 하면 과언일까?
다음 작품은 이름은 [시간의 병치]였다. (병치:竝置 나란히 두다)라는 뜻인데, 이 작품을 보는 내내 시간을 어떻게 나란히 둔 것인지 생각해보았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작품은 원색의 캔버스에 그에 보색으로(예를 들어 파란색 캔버스라면 노란색 물감으로) 산이 간단하게 스케치되어있었다. 그리고 구리선같은 것이 캔버스 앞으로 튀어나오게 달려있었다. 작가는 폭포를 염두에 둔 것 같았다. 2차원과 3차원이 공존하는 캔버스.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길래 그냥 다음으로 넘어갔다.
작품의 제목은 [무제]였다. 으아. 작가는 이름붙이기 쉬웠을 지 몰라도 관람객들은 이런 제목의 추상미술을 보면 난감해진다. 그의 그림은 좀 징그러웠다. 뭐 표현이 적나라하고 그래서 그런게 아니라 사람의 얼굴이 도깨비처럼 추했다. 그 사람안에 작은 사람들이 소화기관처럼, 혈관들처럼 달려있었다. 입은 하나같이 열려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아마, 큰 사람이 말을 한마디 하기까지 작은 사람들이 몸을 돌고 돌면서 그 말을 준비했을 것이다. 가령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면 그건 분명 그사람이 태어나서부터 그 말을 알고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의 주변에 있는, 그래서 그의 몸속을 돌아다니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어본 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기한 건 이 작은 사람들이 큰 사람으로부터 빠져나갈 출구는 없다. 엉덩이에서도 입에서도 그들은 큰 사람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이 좀 무섭게 말하면 '갇혀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영향력이란 것이 그렇지 않나. 내 머릿속에 누군가가 강하게 인상을 남기면 그 인상은 다른 인상들에 묻혀 기억의 어딘가에 숨어있을 뿐이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진 못한다. 당신이 오늘 했던 가벼운 말 한 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가 나의 뇌리속에 평생 잊혀지지 않는 대단한 것이 되어버릴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이 작품을 이렇게 해석했는데, 제목이 [무제]니까 정답이란 건 애초부터 없는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어떻게 느꼇을지 궁금해진다.
다음 작품의 이름은 [버블].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반반 섞은ㅡ, 작품이름을 닮아 비누방울같은 얼굴 하나가 까만 캔버스에 떡 하니 그려져있고 그 옆에는 그 얼굴이 벽을 가득 메우는 커다란 캔버스에 수없이 그것도 다 다른색깔로 그려져있었다.
그 다음 전시실에는 조형물이 잔뜩 진열되어있었다. (피카소가 자전거 안장이랑 ㄴ자 쇠파이프 두개 붙여놨던 조형물 제목이 황소였나? 여튼간에) 피카소의 조형물을 연상시키는 플라스틱 곤충들이었다. 인형 팔을 모아 붙인 파리의 여섯개의 다리, 플라스틱 그릇으로 만들어진 번들번들 파리 날개. 원래 그것들의 자리는 거기가 아니었지만 한 데 모아놓고 이렇게 조합시키니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형태의 표정] 마지막에 배치된 작품들의 제목은 [무제]였는데 사실 전시실에 비치된 것은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 지 않을 정도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바위와 나무덩어리였다. 모든 것은 보는 사람의 기분이나 생각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고 무엇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빛&색채의 표정_ 사람의 눈은 천만 가지 색깔을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색을 구분할 수 있는 명칭이 부족할 정도다. 게다가 나라변 문화마다 색의 쓰임새가 달라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색에서 표정을 단정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색의 표정은 다양하고 뭐라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따라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색은 객관화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색에서 따뜻함과 차가움, 진출감과 후퇴감, 무거움과 가벼움 등 누구나가 공통적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색을 단순히 주관적이거나 임의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색채는 특정한 파장이 있는 빛에 대한 신경계의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는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얘기다. 또한 빛은 공간을 낳게 하고 사물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어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리고 색채에서 색채 간의 유사와 차이를 통해 균형과 조화 혹은 충돌이나 배척현상 등을 일으켜 선으로 나타낼 수 없는 세계를 표현한다. 이 모두가 우리가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처럼 미술에서 색은 생명과도 같으며 미술의 표정을 만드는 귀한 수단이 된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색이 줄 수 있는 느낌은 천만 가지, 그 이상으로 다양하다는 것이다. 같은 빨간 색이라도 초록색과 함께 있을 때와 노란색과 함께 있을 때의 느낌이 달라진다. 이 테마에서는 이렇게 색이 배치됨에 따라 미술의 표정이 어떻게 바뀌는지 말한다.
인상깊언던 작품은 암식의 한쪽벽에는 알록달록 색칠이 되어있고 맞은 편에는 여덟 개 남짓한 의자가 있어 앉으면 색깔이 바뀌고 멜로디가 나오는 것이었다.(위의 그림) 제목은 [의자들의 합창]. 앉을 때마다 의자에서 나는 소리와 색깔이 다 다른데도 다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음악을 만들고 또 이 작품을 완성해나가는 점이 흥미로웠다. 다른 건 기억에 그닥 남지 않는게, 그냥 우리가 일상적으로도 볼 수 있는 색채의 효과들이 이젠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화가들이 보여주는 것에 그닥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작품 제목은 잘 기억이 안난다. 실제로 보면 더 흥미로운 그림인데. 사과의 색깔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지만 이 그림의 압권은 그림자에있다. 그림자는 검은색이 아니다. 그림자는 빛과 무관하지 않다. 심지어 그림자의 색깔까지도. 누가 그림자를 검다고만 말하는가?
그림에서 무엇이 느껴지는가? 딱딱한 나무껍질? 먼지?
작가는 폭포수의 일부를 보고 그렸다고 한다. 그 관찰력이 놀랍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