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계.
간만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좋은 영화를 만났다. 뜻밖의 성과였다. 하고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다 옮겨적자니 너무 두서가 없다. 그래도 적어놓고 갈란다.
당신의 애인이 마음이 변한 걸 알면서도, 너무나 사랑해서 잡고 싶을 때
혹은 날 좋아하는지 아닌건지 너무도 헷갈리게 만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에게 자꾸자꾸 눈이 갈 때
당신은 진심을 말해달라고 하겠는가?, 그렇다면 어떤 대답을 원하는가?
"진심을 말해줘, 믿을테니까."
이 영화를 감히 정의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대답할 수 없어 공허한 하지만 대답을 너무도 절실히 갈구하게 만드는, 그 질문에 대한 비망록이라고.
이안 감독의 영화는 아직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와호장룡]에서 화면을 은은하게 메꾸어가는 거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꼭 필요한 소재와 상황을 적재적소에 넣어 멋진 영화를 만들어냈다. 절대 과장하지 않았다. [와호장룡]에서 관객들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무협 영화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경공법이나 장풍, 화려한 액션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액션이 쳐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세련되고 절제된 감정표현이 남긴 기나긴 여운이었다. 그는 보일 수 있는 모든 장치에 완벽에 가까운 심혈을 기울였고,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로 관객의 마음을 움직였다.
[색,계]에서 역시 그러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처음 이 영화가 우리 나라에 홍보될 때 크게 내걸어진 슬로건은 "파격적 정사씬"이었다. 그래서 난 냉큼 겁이 났고 그다음엔 호기심이 났다. 하지만 혹여 그 호기심에만 동해서 영화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분명 "진짜 야하다."는 말만 연사하며 영화관을 나왔을 거다. 동시에 감독이 영화에 그런 장면을 넣은 이유를 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영화 전체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과도 일치한다. 앞으로 그들은 [색,계]라 하면 "무지무지 야했던 영화"쯤으로 기억하게 되겠지. 그건 참 슬픈 일이다. 이 영화가 하고싶었던 말이 뭔지 이해하지 못하고 영화관을 나서는 사람들만큼 불쌍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나 역시 그 말을 정확히 짚었다고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내 식대로 해석해보고자 한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감독은 분명 딱 필요한 만큼의 베드신을 준비했다. 그의 전작들에서 연애 감정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을 아꼈던 그가, 이렇게도 '심하게' 베드신을 넣은 것은 그만큼의 이유가 있다는 걸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해해주셨으면 좋겠다.
그 이유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린 먼저 양조위라는 배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내가 양조위를 좋아하게 된 건 중학교 2학년 때, 더 네임이라는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서부터였다. 이름도 몰랐는데 알고보니 중국의 유명배우란다. 사람들은 그의 눈빛이 깊다고 칭찬들을 했다. 난 그냥 그말을 따라하곤 했다. 그가 참 멋지다고 생각은 했지만 도무지 어디가 멋있는지 콕 집어 이야기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고르자면 아직도 기억에 남는, 뮤직비디오 속 모습 때문이었다.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활짝 웃으면서도 쓸쓸함을 감출 수 없었고.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 끝에 옛 애인을 만났을 때 그의 표정이란 것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의 표정 속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눈빛 속엔 그녀를 다시 만났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과, 배신감과, 그 배신조차도 포용해내는- 오랜 기다림이 배어나는 더 큰 사랑이 어려있었다. 그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에서도 그의 표정은 복잡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겐 강하고 분명한 인상을 남겼었다. 그 이후로 그의 영화를 여러개 봐왔다. [중경삼림][천녀유혼3][화양연화][무간도1,2,3][영웅][2046][상성] 그리고. 오늘 [색,계]까지. 매 영화마다 그 배역에 충분히 녹아든 그의 눈빛을 볼 수 있었기에 무지 야한 영화란 걸 알면서도 난 그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것인지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외로움과 불안을 그 깊은 두눈에 가득 담은 이李로 분해있었다.
치아즈는, 그리고 나는 이의 눈빛은 너무나 깊어서 처음엔 그 의미를 읽어낼 수가 없었다. 도리어 그는 그녀를 꿰뚫고 그녀의 마음속까지 모조리 읽어낼 것 처럼 고요하지만 강렬했다. 마치 상대에게 경계를 풀지 않았지만 이미 싸움에 지칠 대로 지쳐버린 맹수의 눈빛과도 닮아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곧 침대 위에서 그녀를 무섭게도[!]몰아댔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처음부터 간단했다. "진심을 말해줘, 믿을 테니까." '진심'이라. 그녀의 마음은 먹먹했을 것이다. 무슨 대답을 해야할까. "당신을 증오한다.........고 하면, 믿을건가요?" 그게 그녀의 진심이라 해도 이는 쉽게 그녀를 놓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매력은 너무나 치명적이었고, 그 매력에 이미 한 발 담군 그로서는 그녀의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만치 괴로울테니까. 그렇다고 "당신을 사랑한다." 쉽게 말한다면, 당장 그는 치아즈를 죽여버렸을지도 모른다.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는 중에 도리어 긍정적 확답은 부정적 확신을 심어주기도 하는 것이니까. 그녀의 어떤 대답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이 스스로는 이미 알고있었던 것 같다. 그는 아직 그녀의 마음, 그리고 심지어 자기 마음까지도 믿을수도 믿고싶지도 않았다. 신중함, 또는 망설임의 갈래길에 선 그는 그래서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바스러질정도로 안아버리기도 했고 잔인하게 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더더욱 거칠게 그녀를 몰아부쳤다. 말해줘, 아니 말하지 마. 말해줘.. 줘. 너의 진심, 너의 모든 것. 침대 위에서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거다. 그녀의 입으로 하는 말로는 믿을 수 없어서 그녀의 몸에 물었던 것이었다. 날 사랑하니? 날 사랑한다고 말해. 날 사랑해.. 사랑해달라고. 사랑해줘. 베드신이 그렇게도 격렬했던 건 이가 하고싶었던 말이 그만큼 절실했음을 반증한다.
그는 지독히 외로웠다. 사실 그 역시 다른 친일파 간부들이 그러했듯이 두려웠다. 그 두려움과 외로움이 들킬까봐 불안했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에게라도 그의 마음이 들킬까봐 잔혹함으로 자신을 꽁꽁 포장해두었다. 그런 그에게 그녀는 자기 내면으로의 위협일 수도, 위로의 손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모든 것은 의심의 대상이란 걸 그는 알았기에 그녀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기까지 긴긴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손을 감싸는 따스한 그녀의 손에서, 그동안 침대 위에서 느꼈던 어떤 희열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건 확신, 그녀가 나를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 순간 치아즈 역시 느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날 정말 나를 믿고 있구나. 그건 그녀에게 기쁨이자 슬픔이었다. 그 순간이 두 사람의 사랑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걸 알고있었으니까. 둘은 그날 아무런 육체적 접촉 없이 헤어진다. 믿음이란 게 생긴후 이가 궁금해하던 그 공허한 물음에 거짓말처럼 답이 생겨났으니까.
하지만 그 답은 결코 그들을 기쁘게 할 수 없었다. 파멸은 필연적이었다. 처음부터 그들의 사이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가요, 어서..........!" 침대에서 뱉어냈던 신음처럼 그녀는 겨우 말했다. 그건 그렇게도 그가 원하던 대답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사랑고백이었다. 그리고 파멸 앞에 선 외마디 비명이었다. 누가 감히 그녀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봐온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그녀를 이해한다. 그녀를 용서하는 건, 이와 치아즈 두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일테니. 내 이야기는 이쯤 접는게 좋을 것 같다.
접기 전에 이 글 맨앞에 썼던 질문에 당신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 되새겨 보자. 당신은 진심을 말해달라고 할 수 없다면, 당신 역시 이 영화에 공감할 것이다. 진심을 말해달라고 했으면서도 돌아올 대답에 자신이 없다면 당신은 이 영화에 공감할 것이다.
상대방에게 듣고 싶은 말과, 상대방이 하고싶은 말이 다를 때. 그 상대방이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일 때 그 사실이 주는 슬픔은 얼마나 큰가. 그래서 그 슬픔을 알기에 주저주저하다가 망설임끝에 사랑을 포기한 이들에게 감독은 [이런 사랑도 있다.]고 담담히 위로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와 한핏줄에 있는 영화로 2004년작 [클로저]와 김지운 감독 작품[달콤한 인생]을 꼽고 싶다. 이유는 간단하다. [클로저] 속 네 명의 등장인물과, [달콤한 인생]의 선우와 강사장 역시 자신이 상대방에게 원하는 마음과 상대방의 진심의 부딪힘에 괴로워한다. 그래서 선뜻 묻지 못하고 [클로저]에선 슬픈 방황 끝에 네 명 모두 불행해지는 결말을 낳고, [달콤한 인생]에선 두 사람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피튀기는 활극이 벌어진다. 사랑, 그놈의 사랑이 뭐길래. 결코 세 영화 모두 이상적 결말을 담지 않는다. 도리어 현실적이고 슬픈 결말을 배치한 건 언젠가 한번쯤 그런 상황에 부딪혔을, 또는 부딪힐 관객들에게 나름의 돌파구를 찾을 여지를 남겨주고 싶은 감독의 작은 배려가 아닐런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