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의부스러기

하얀 거탑 3악장 - the great honor

timid 2007. 10. 31. 11:21

 

지리하게도 공판은 길어졌다. 분명한 승리를 목도에 두고서도 믿어왔던 유미란 간호사의 흔들리는 모습과, 대리운전대를 잡았던 권순일 환자의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장준혁은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난 잘못한게 없는데, 왜 내 잘못이라는 것에 얽매여서 이사람들이 괴로워해야하는거지. 그리고 그들앞에 냉정을 유지하는 - 유간호사의 남편에게 압력을 집어넣고 환자의 아들에게 위로차원의 돈을 건네는 자신을 발견해냄으로써, 결국 그가 그 약한자들과의 싸움에선 참혹하게 패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변한것인가. 나는, 더러운 인간인가. 걷잡을 수 없이 달려오고나니 내가 걸어온 길은 참으로 더러웠다. 하지만 인정할 수는 없었다. 난 그 수술에 성공했어, 그 단순한 사실을 끝까지 관철하고 싶었고 그럼으로 권순일 환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게 나를 위해서도, 명인대학 외과를 위해서도 옳은 일이었다. [명인대 외과의 수장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염동일이 기어이 무너졌다. [저는 과장님의 장난감이 아니에요!] 망가지더라도 내 옆을 지킬 줄 알았던 녀석이 결국 등을 돌렸다. 화가 나고, 씁슬했다. 그래, 씁슬했다.

 

장준혁은 결국 권순일 환자의 죽음에 책임을 지는 대신 그 이후에 환자유족들의 패소를 이끌어내기위해 했던 추잡한 짓들로 항소심에서 패한다. 물론 자기가 벌여왔던 일들을 부정할 만큼 그는 치졸한 사람이 아니지만, 한번도 승리 이외의 것을 쥐어본 적 없는 그에게 [패소]라는 두 글자는 참 허망했다. 그는 끝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그러던 중에 그는 아팠다. 처음엔 그냥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사의 직감이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었다. 너무나 확실한 '끝'앞에서 누군가 이젠 쉬라고 분명하게 말해줬으면 싶었는데, 그를 아끼고 추종하는 박건하 이하의 의국장 녀석들은 그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더 충격적일 듯 싶어 겨우겨우 사실을 숨긴다. 심지어 그의 앞에선 진실과 충고만을 일관했던 친구 최도영까지 그의 끝을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숨긴다. 그가 원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는지 모른다. 쉼없이 걸어온 길, 때론 비열하고 추했지만 그렇게 쌓아올린 [하얀 거탑]의 중턱에서 이제 그만 내려와서 쉬라고 그동안 욕봤다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면 참 편할 것이라고 아주 조금이라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가야할 길은 너무나 멀었고, 아직 거탑의 중간까지밖에 올라오지 않았는데 여기서 내려가는 건 너무 아깝잖아. 하는 생각이, 그리고 야망이 머리 속에 가슴속에 너무도 오랫동안 자리잡아와있었다. 이걸 뽑아내는 순간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을 만큼.

 

정말로 그가 야망을 내려놓은 순간 죽음은 급속도로 그와 더 가까워졌고, 그 앞에서 그는 천재 외과의가 아닌 그냥 병약한 인간 장준혁일 뿐이었다. 그는 빈 손이었다. 권력의 정상에서 세상에서 가장 약한 자의 자리, 그 낭떠러지까지 내려간 장준혁이라는 사람의 기구한 인생을 김명민은 참 절절하게 그려냈다. 그의 생의 마지막에 가서 수술실 윈도우로 들어가 자기의 수술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신문을 거꾸로 들고 담담한 척 했던 그의 모습에선 이 사람이 그렇게 권력과 야망에 몸부림치던 내가 그렇게 미워하던 장준혁이 맞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 가엾고 그의 나약함이 이제야 나의 그것과 닮아있는 거 같아 미칠듯한 동질감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마지막 순간 최도영의 손을 놓지 않고 괴로움속에 뱉었던 신음 같은 그의 유언 앞에서 정말 펑펑 울었다. 놓아야 하는 걸 알면서도 놓을 수 없던 그가 쌓아올린 그곳의 그 자리, [아직 수술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난 실패하지 않았어, 난 그 수술에 성공했어..............] 참으로 슬픈 우리 시대 모든 월급과 계급 사회에 메인 '아버지'로 대변되는 이들의 집념을 그는 마지막까지 정말 절절하게 토해냈다. [기억할게, 장준혁...... 오래오래 잊지 않을게....]그래서 그를 위해 희재는 울면서 담담한 척 그렇게 말했던 거다. 장준혁이 정말 원했던 건 명인대학 외과의 장준혁 그리고 수술에 한번도 실패한 적 없는 유능한 의사 장준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 장준혁이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지지 않는 것, 바로 the great honor였을 테니.

 

여기서 하얀 거탑 중반부에 의학계의 유능했던 원로의 퇴임식이 생각난다. 장준혁뿐만 아니라 이주완, 박건하 그 모든 사람들이 그의 명예에 감탄했고 반면 행사 도중 쓰러진 얼음탑을 보면서 씁슬해했었다. 명예란 것은 그렇게 탐스럽고도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 드라마가 우리에게 하고싶은 말은 너무너무 많았다. 그 말들이 아직도 마음 속에 쟁쟁하게 남아,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는 감동으로 자리한 것이라 생각한다. 장준혁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고 가장 강하고 깊은 인상을 남긴건 사실이지만 어떻게 이 드라마 속 인물 한 명 한 명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드라마 속에서 이해관계에 부딪히고 고뇌하고 실재實在하는 우리 모두의 너무나 디테일한 군상인 것이다. 다시 이런 드라마가 또 나올수 있을런지 생각만으로 참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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