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탑 - 2악장 the last stand
[명인대학 외과에, 계속 남고 싶지 않아?]
그토록 믿어왔고 존경해왔던, 과장님은 이렇게 말하고 차갑게 차유리를 올려버렸다. 이렇게 나왔으면, 당신 감정에 호소했으면, ㅡ내가 당신 입장에 있었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ㅡ [아, 그래?] 하면서 차문을 열고 나와주시길 바랬는데. 이미 당신이 탄 차는 저만치 병원을 벗어나고 있다. 병원에 남은 사람이라곤, 나와 권순일 환자, 보호자. 이렇게 세 명 뿐인듯, 휑하다. 불안하다. 괴롭다. 이젠 어떡하지?
이 드라마는 착한 사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너무나 치밀하고 사실적이어서 보는 내가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결국 착한 사람이 제일 욕을 먹고 그래야 마땅하다. 왜냐고?
착하다 : [형용사]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어질다. - 국어사전.
하지만 이제 더이상 우리 사회에서 착한 사람은 어질지 못하다. 착하다의 유의어는 "바르다, 선하다."가 아니다. "유약하다, 어리석다."일 뿐이다. 나는 염동일에게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가 너무나 가증스러웠다.
그에게 선배이자 상사인 장준혁은 의사로서 갖춰야할 social skill, 실력 등 모든 것을 다 갖춘 하나의 우상이었다. [과장님처럼 되고싶어요.] 하지만 그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염동일과 장준혁이라는 두가지 인간상은 닮은 곳을 찾을 수 없다. 장준혁은 현실적이고 지금 닥친 난관을 직시하고 정면돌파한다. 연민이고, 감상이고 그가 가는길에 방해가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그는 그것을 자기 인생에서 배제시킨다. 착한 사람과 착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다. 그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쁜 사람이라고 나무랄 것도 없다. 염동일은 그와 다르다. 착하다. 너무나도. 착한 사람들은 대개 감성적이다. 일의 전체적인 이해타산이나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 보다는 인간관계나 타인의 감정을- 좋고 싫음을 먼저 생각한다. 될수있으면 난관을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그런 일이 생기면 부딪히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쓴다. 어려운 현실을 때론 외면한다. 그럴만한 용기도 없으면서. 외면하는 척하면서도 끊임없이 갈등한다. 권순일 환자 사건에서 그는 착한 사람이 난관을 대하는 가장 전형적인 접근방법을 보여줬다. 미리 잘라 말하고 싶다. "권순일을 죽게 만든건 염동일이다."
첫 환자가 들어왔다. 과장님께서 수술을 해주셨고, 이제 곧 호전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믿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환자는 수술 후유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큰 고통을 호소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과장님께 찾아가봤지만 대답은 차갑다. 그런 환자 하나 제대로 신경을 못쓰냐면서. 내과에서 외과로 트랜스퍼 된거라 최 교수님 역시 그 환자에 대한 걱정이 남다르시다. 교수님의 마음은 알겠지만, 나 역시 교수님의 마음과 같지만 교수님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외과에서의 내 입장이 난처해졌다. 교수님께 화를 내고 등을 돌렸었다. 하지만 돌아서면서도 알 수 없는 불안함에 진저리쳤다. 일종의 예감이랄까. [외과일에 내과가 신경쓰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외과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과장님이 시키신대로, 지켜보다가 항생제를 바꿔넣어주기도 하고 또 기다리길 반복했지만 환자의 증세는 더 악화되었다. 내가 봐도 이건 무슨 문제가 있는게 분명했지만 누구도 동의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생각을 접어버렸다. 난 정말 다급해서 여쭤보는 것임에도 과장님은 세계 학회장 부인 수술 문제로 바쁘셔서 날 귀찮게 여기실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 난감해서, 난 정말 최후의 방법으로 여쭤보는 것이었는데. 환자는 계속 아프고, 과장님은 화를 내셨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다. 숨어있기도 했었다. 그러는 사이에.... 환자가 죽었다. 그럴 순 없어, 과장님이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이 환자가 죽을 리가 없잖아.........! 내탓이 아니야, 내탓이 아니야....... 난 과장님이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이야..........
착한 사람은 유능하지 않다. 그럴 수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부터가 너무나 약하게 형성되어있기 때문이다.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다. 염동일의 실력이 어느정도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미 의사로서의 자격 조건을 박탈했다. 환자 앞에 자신의 소신을 펼 수 없다면 그 사람의 인품이 얼마나 뛰어나든 간에 그는 실패한 의사일 뿐이다. 정말 권순일 환자에게 할 수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을까? 만약 염동일이 장준혁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어떻게든 그 환자를 살렸을 것이다. 상사와 선배들과의 소신이 어긋난다고 해서 환자를 죽일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조금만 더 약삭빠른 사람이었다면, 장준혁과 끝까지 러닝 메이트로 가려면, [장과장님처럼 되려면,] 그의 의견을 무조건 맹신하고 따르는 게 아니라, 권순일을 어떻게든 살렸어야 했다는 걸 알았을텐데. 아쉽다. 그는 너무나 착해서 권순일을 죽였다. 고달프다, 명인대 외과의로 계속 남아서 산다는 것은. 그는 분명 [그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최선을 다했지만, 환자를 죽인 건 염동일이다. 그러면서 그 책임을 은근히 장준혁에게 돌리고 있다. 장준혁 역시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하는 건 사실이지만 결정적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그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권순일 환자의 유족들이 오진의 의혹을 제기하고, 공판이 열리면서 사태는 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담당의는 염동일이지만 집도를 한건 장준혁이었다. 유족들은 수술후 간병이 아니라, 수술에 의혹을 제기했고, 장준혁은 외과의 수장으로서의 자기 입지와 명인대 외과의 네임 밸류가 실추되는 것을 목도할 수 없기에 기꺼이 그 의혹에 응수했고 재판이 열렸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은 진리이지만, 글쎄다. 정의는 애시당초 없었던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책임자가 장준혁뿐만이 아닌데[수술하기 전에 폐생검을 하지 않은 게 모든 문제의 시작이긴 하지만], 장준혁에게만 책임을 묻고 재판을 신청한 것이 유족들의 잘못이었고, 유족들이 약하다고 해서 그들이 손댈 수 없는 돈과 권력으로- 너무나 강한 것들로 그들의 입을 막은 것이 장준혁의 잘못이었다. 둘 다 잘못을 했다. 굳이 잘못의 무게를 따지자면 장준혁이 유족들을 궁지로 몰아넣었으니 그쪽이 더 잘못했다고 해 두자. 진실과 거짓의 싸움에서 약자와 강자의 싸움으로 변해버린 아우토반에, 염동일은 어디있었나?
염동일은 가장 중요한 자리에, 어정쩡한 자리에 서 있었다. 강자와 약자 사이, 야망과 양심 사이,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그는 고민하며 서성대고 있었다. 권순일 환자의 죽음이 자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기에 유족들에게 미안하고 외과 식구들에게 미안했다. 한편 약자를 억누르고 자기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장준혁이, 명인대학교 외과라는 거대한 괴물이 무섭고 싫었다. 그 괴물에 메어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도 끊임 없이 했다. 그동안 메어 있었던 곳에 대한 충성에 자꾸 의혹이 들었고 개인적인 양심을 펼칠 용기도 없다. 그는 어정쩡했다. 이번에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존경하는 최 교수가 권순일 환자 유족을 옹호하다가 병원에서 나가는 걸 보면서도, 어렵게 살아가는 유족들을 보면서도. 그리고 이기려고 끝끝내 자신의 수술에는 잘못이 없음을 밝히려고 길길이 뛰는 장준혁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음으로 해서 결국 그는 죽은 환자의 담당의로서, 또 명인대학병원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으로부터 모두 헐거워질 수 있었다. 착한 사람이 난관을 빠져나오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착한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꿋꿋-이, 다소 멍청하게 지켜서서는 모든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는. 그게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은 욕을 먹어도 싸다. 염동일은 착하지만 제일 나쁜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