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모네모 스펀지송
내사랑 스펀지 송.
처음에 창모가 이 만화를 볼땐 이게 뭔가 했다. 무슨 저런 말도 안되는 만화를 애들 보라고 교육방송은 버젓이 저걸 애들이 만화를 보는 황금시간대 (7시- 7시 30분까지)에 보여주나 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창모가 보는 김에 같이 묻어가기로 본 이 만화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이게 뭐야"에서 "이런 만화도 있다니!" 깔깔깔. 마구 웃었다. 정말 충격적이면서, 그것은 참신하게 다가왔다. 이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 하나하나가 전부 바보같으면서도 그동안 만화에서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참신한 바보같았다. 스펀지송, 별가, 깐깐징어, 게걸사장, 다롱이 모두. 참을 수 없이 끝도없이 날 웃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는지, 아 바보들만 출연하는 이 만화를 삐딱선으로 보게되었다. 이게 단순히 재미나고 우스운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라는, 좀 진부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게걸사장의 게살버거에 지독한 경쟁의식을 느끼는 플랑크톤 버거의 사장 [플랑크톤]과 스펀지송 사이의 우정이야기가 그랬다.
게살버거에 대한 집착만으로 머리속이 그득했던 플랑크톤 사장에게 진심어린 우정으로 손을 내민 스펀지송, 그의 진심에 플랑크톤은 수전노같았던 인생은 끈끈한 우정으로 산뜻하게 변모했었던 듯 했지만 결국 나중에는 스펀지송이 갖고 있던 게살버거를 훔쳐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문득 참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플랑크톤 사장의 그런 행동이 오늘날의 우리의 단면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심, 감동] 따위의 의미에 무색해져버린 우리들은 자못 그런 것들에 마음이 흔들리고 그것에 동화되려 하다가도 결국은 자질구레하고 내 이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을 가차없이 제 인생에서 밀어내 버린다. 브라운관 앞에서 스펀지송의 진심을 의심하고 그러면서도 신뢰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복잡미묘소심하게 구는 플랑크톤 사장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깔깔 웃지만, 결국 그게 우리 모습에 대한 풍자일 수있다는 생각에 씁슬해졌다.
스펀지송은 실재할 수 있다. 스펀지송은 우리 주변에 [아직도 '해파리 채집'을 좋아하고 '게살버거'를 잘 만드는 스펀지송처럼, ] 순수함을 간직한 채 바보같지만 웃으며 살아가는 따스한 사람들의 대변인일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그냥 순간순간의 일상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따뜻함을 간직할 뿐이다. 난 그들을 동경한다. 스펀지송보다 더 나아보이고 잘난 척 뿐인 깐깐징어도 결국은 바보고, 정말 머리 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듯한 별가도 바보고, 마음은 따숩지만 실속없는 스펀지송도 바보다. 모두가 바보인 현실 속에서 난 기왕이면 스펀지송 같은, 스펀지처럼 폭신한 바보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