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손민호.최정동 기자] 2002년 4월 15일. 그는 경남 김해의 한 야산을 오르고 있었다. 비는 좀체 그치지 않았다. 종일 내린 비로 산기슭은 뻘처럼 질퍽거렸다. 수십 차례 기어오르고 수십 차례 미끄러졌다. 진흙 범벅이 된 채 겨우 중턱에 다다랐다. 기체 파편이 보였다. 중국 국제항공 CCA-129편 보잉767 여객기. 승객 155명을 태우고 중국 베이징을 이륙 해 김해공항에 착륙 직전 추락한 비행기다. 한 일간지 사회부 기자로서 그는 거기에 있었다. 그 때를 그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목격한 순간"이라고 회고한다. 수십 명이 팔다리가 잘려 죽었고 수십 명이 불에 타 죽었다. 9명은 산산이 조각났는지 시신도 찾지 못했다. 그런데 39명이 살았다. 살아남은 한 명은 제 발로 산을 내려와 "저기에 비행기가 떨어졌어요"라고 신고했다. 사회부 기자는 그 장면을 기사로 옮기지 못했다. 6하 원칙을 떠받드는 기사체로는, 삶과 죽음은 비행기 좌석에 따라 갈리는 것이라고 쓸 수 없었다. 진흙 범벅인 채로 한참을 쪼그려 앉았던 반백(半白) 기자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접힌 어깨는 좁았고, 비는 좀체 그치지 않았다.
올해 황순원문학상 수상자 김훈씨를 인터뷰하러 경기도 일산 그의 집에 들렀을 때 그는 비행기 사고 얘기를 꺼냈다. 기자였던 작가와 그의 기자 시절을 지켜봤던 기자가 3년 전 진흙 범벅인 채로 한 공간에 있었던 건 우연이었다. 하나 인터뷰 화제로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 경험은 수상작 '언니의 폐경'의 주요 모티브다.
올해 수상작은 다분히 논쟁적이다. 2001년 동인문학상 수상작 '칼의 노래'를 냈을 때나 지난해 첫번째 단편 '화장'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았을 때 그는 문단의 여성 논객들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다. 여성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혹은 폄하함으로써 여성에대한 올바른 인식을 저해한다고 그들은 공격했다. 그러한 김훈이 50대 여성을 화자로 삼아 여성의 몸을, 그것도 가장 은밀한 월경과 폐경에 관하여 소설을 썼고, 그 작품이 수상작이 됐다.
"인간의 몸은 아름답다는 얘길 하고 싶었소. 인간의 삶이 아름답기에 죽음도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소. '칼의 노래'부터 이제껏 내가 떠들어온 얘기는 단 하나요. 인간은 아름답다는 것이오."
실제로 그는 몸에 집착해왔다. 그의 주인공들은 전쟁터에 있거나 죽음을 경험 또는 목격하거나 죽음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죽음은 결국 몸의 시효에 관한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자전거를 유독 밝히는 것도 땅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서다. 몸은 김훈 문학의 본령일 수 있다.
기사 모두(冒頭)는 이른바'김훈체'를 염두에 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러 흉내낸 문장이다. 형용사는 극히 배제하고 비유는 최대한 삼간다. 작가는 이야기 개입을 꺼린다. 정히 끼어들고 싶으면 대사로 표현한다. 사실을 수시로 인용하는 묘사는 치밀하고 가차없다. 호흡보다 짧은 문장은 사건을 따라 무연히 나아갈 뿐이다. 하여 그의 문장은 기록에 가깝다. 여기서 연상되는 두 가지. 그가 대학교 때 처음 읽었다는 '난중일기'와 27년간 "밥벌이를 위해" 썼다는 신문의 보도 기사다. 기사체에 갇힌 사고를 경멸했던 기자는 작가가 된 오늘 기사체의 치열함을 바탕으로 소설을 쓴다. "아이러니 아니냐"고 묻자 "삶과 죽음이라는 도저한 문제를 나는 호들갑 떨며 말할 줄 모른다"고 답했다.
인터뷰 다음 날. 그가 신문사 근처로 찾아왔다. 그리고 "약력을 꼭 이렇게 써달라"고 부탁했다. "내 몸뚱아리로 만들어낸 유일한 자랑거리"라는 이유를 댔다. 부탁대로 약력을 적는다.
글=손민호, 사진=최정동 기자
◆1948년 서울 출생
◆현 자전거 레이서. 평균시속 21.5㎞, 내리막 최고시속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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